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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맹자집주(孟子集註)

[맹자집주 맹자서설(孟子序說) 1] 맹자의 일생 (孟軻 騶人也)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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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列傳>曰: “孟軻, (사기열전왈 맹가) 

사기 열전에 이르기를: 맹가,

 

趙氏曰: “孟子, 魯公族孟孫之後.” 漢書注云: “字子車.” 一說: “字子輿.”

조씨가 말하기를: 맹자(孟子)는, 노나라(魯) 공족(公族) 맹손씨의 후손이다(孟孫之後). 한서의 주에 이르기를(漢書注云): 자는 자차다(字子車). 다른 설에(一說): 자는 자거다(字子輿).

 

騶人也, (추인야) 

추나라 사람이고,

 

騶亦作鄒, 本邾國也.

추(騶)는 또한(亦) 추라고도 쓰고(作鄒), 본래(本) 주나라다(邾國也).

 

受業子思之門人. (수업자사지문인) 

受業자사의(子思之) 문인에게(門人) 배웠다(受業).

 

子思, 孔子之孫, 名伋. 索隱云: “王劭以人爲衍字.” 而趙氏註及孔叢子等書亦皆云: “孟子親受業於子思.” 未知是否.

자사(子思)는, 공자의 후손(孔子之孫)이며, 이름은 급이다(名伋).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王劭以人爲衍字.” 而조씨가(趙氏) 주를 달아(註) 공총자(孔叢子) 등의 책(等書)에 미쳐서(及) 또한(亦) 모두 말하기를(皆云): 맹자가(孟子) 자사에게(於子思) 친히(親) 수업을 받았다(受業)고 했다. 옳은지 그른지(是否) 알지 못한다(未知).

 

道旣通, (도기통) 

도가 통하고 나서,

 

趙氏曰: “孟子通五經, 尤長於詩書.”

조씨가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오경에 통달하고(通五經), 더욱이(尤) 시서에(於詩書) 뛰어났다(長)고 했다.

程子曰: “孟子曰: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聖之時者也.’ 故知易者莫如孟子.

맹자가(孟子) 말하기를: 벼슬할 수 있으면(可以仕則) 벼슬하고(仕), 그만둘 수 있으면(可以止則) 그만두고(止), 오래할 수 있으면(可以久則) 오래하고(久), 빨리할 수 있으면(可以速則) 빨리한다(速)고 하고, 공자(孔子)는 성인의 때(聖之時)를 <아는> 사람이다(者也)고 했다. 그러므로(故) 역을 아(知易) 사람이(者) 맹자와 같은(如孟子) 사람이 없다(莫).

又曰: ‘王者之跡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 又曰: ‘春秋無義戰.’ 又曰: ‘春秋天子之事’, 故知春秋者莫如孟子.”

또 말하기를: 왕자의 흔적(王者之跡)이 사라지고(熄而) 시가 사라졌고(詩亡), 시가 사라진(詩亡) 뒤에(然後) 춘추가 지어졌다(春秋作). 또 말하기를: 춘추에는(春秋) 의로운 전쟁(義戰)이 없다(無). 또 말하기를: 춘추(春秋)는 천자의 일(天子之事)이라 했다. 그러므로(故) 춘추를 아는(知春秋) 것(者)이 맹자 같은(如孟子) 사람이 없다(莫).

 

尹氏曰: “以此而言, 則趙氏謂孟子長於詩書而已, 豈知孟子者哉?”

윤씨가 말하기를: 이것으로(以此而) 말한(言) 것은, 곧(則) 조씨(趙氏)가 맹자가(孟子) 시서에 뛰어났을(長於詩書) 뿐이라는(而已) 말이니(謂), 어찌(豈) 맹자라는 사람을 아는(知孟子者) 것이겠는가(哉)?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유사제선왕 선왕불능용 적양 양혜왕불과소언 견즉이위우원이 활어사정)

제나라 선왕(齊宣王)을 섬기러(事) 갔는데(游), 선왕(宣王)이 쓸 수 없었다(不能用). 양나라(梁)로 가서(適), 양혜왕(梁惠王)이 말한 것()을 해내지 못하므로(不果, 則), 현실과 거리가 멀고(迂遠而) 사정에 어둡다(闊於事)고 여겨졌음을(以爲) 알 수 있다(見).

按史記: “梁惠王之三十五年乙酉, 孟子始至梁. 其後二十三年, 當齊湣王之十年丁未, 齊人伐燕, 而孟子在齊.”

사기에 보면: 양혜왕(梁惠王之) 삼십오년, 을유년(三十五年乙酉)에, 맹자(孟子)가 비로소(始) 양나라에 이르렀고(至梁). 이십삼년에(二十三年) 뒤에(其後), 제나라 민왕(齊湣王之) 십년 정미년(十年丁未)에 당하여(當), 제나라(齊人)가 연나라를 정벌하고(伐燕, 而), 맹자가(孟子) 제나라에 있었다(在齊).

故古史謂 “孟子先事齊宣王後乃見梁惠王·襄王·齊湣王.” 獨孟子以伐燕爲宣王時事, 與史記·荀子等書皆不合.

그러므로(故) 고사에서(古史)  맹자(孟子)가 먼저(先) 제선왕을 섬기고(事齊宣王) 뒤에(後乃) 양혜왕과 양왕, 제민왕을 만났다고(見梁惠王·襄王·齊湣王) 말한다(謂). 오직(獨) 맹자에서만(孟子) 연을 정벌한 것을(以伐燕) 선왕 때의 일(宣王時事)이라 했는데(爲), 사기, 순자 등이 책과 더불어(與史記·荀子等書) 모두(皆) 부합하지 않는다(不合).

 

而通鑑以伐燕之歲, 爲宣王十九年, 則是孟子先游梁而後至齊見宣王矣. 然考異亦無他據, 又未知孰是也.

통감에서는 연나라를 정벌한 연도를, 선왕 십구 년으로 했으니, 이것은 맹자가 먼저 양나라에 가고 나서 제나라 선왕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고이에도 또한 다른 근거가 없고,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다.

當是之時, 秦用商鞅, 楚魏用吳起, 齊用孫子·田忌. (당시지시 진용상앙 초위용오기 제용손자전기)

이 때에(當是之時), 진나라(秦)가 상앙(商鞅)을 등용하고(用), 초나라와 위나라(楚魏)가 오기(吳起)를 등용하고(用), 제나라(齊)가 손자와 전기(孫子·田忌)를 등용(用)했다.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

(천하방무어합종연횡 이정벌위현 이맹가내술당우삼대지덕 시이소여자불합)

천하(天下)가 바야흐로(方) 합종연횡에(於合從連衡) 힘쓰고(務), 정벌을(以攻伐) 어질다고 여겼으나(爲賢, 而), 맹가(孟軻)는 당우와 삼대의 덕(乃唐·虞·三代之德)을 전술하고(述), 이 때문에(是以) 임금과(所如者) <뜻이> 맞지 않았다(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퇴이여만장지도서시서 술중니지의 작맹자칠편)

물러나서(退而) 만장의 무리(萬章之徒)와 함께(與) 시경과 서경(詩書)의 순서를 매기고(序), 중니의 뜻(仲尼之意)을 전술했다(述). 맹자(孟子) 칠편(七篇)을 지었다(作).

趙氏曰: “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조씨가 말하기를: 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韓子曰: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沒,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한자가 말하기를: 맹가의 책(孟軻之書)은, 맹가(軻)가 혼자(自) 지은 것(著)이 아니다(非). 맹가가 죽은 뒤에(軻旣沒), 그 무리(其徒)인 만장, 공손추(萬章·公孫丑)가 서로 함께(相與) 맹가가 말한 것(軻所言)을 기록(記)한 것일 뿐이다(焉耳)

 

愚按: 二說不同, 史記近是.

내가 생각하기에: 두 설이 같지 않고, 사기가 옳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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