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者(중자), 不偏不倚(불편불기)ㆍ無過不及之名(무과불급지명); 庸(용), 平常也(평상야).
중(中)이란 것은(者), 치우치지(偏) 않고(不) 기울지(倚) 않으며(不), 지나치거나(過) 미치지(及) 못함(不)이 없음(無)의(之) 이름이고(名); 용(庸)은, 일상적인(平常) 것이다(也).
『或問』曰: “所謂平常, 亦曰事理之當然, 而無所詭異云爾, 是固非有甚高難行之事, 而亦豈同流合汙之謂哉!”
<혹문>에서 말하기를: 이른바(所謂) 평상은(平常), 또한(亦) 사리의(事理之) 당연함(當然)을 말하고(曰, 而) 괴이한(詭異) 것이(所) 없음(無)을 말할(云) 뿐이니(爾), 이런(是) 고로(固) 매우(甚) 높고(高) 어려운(難) 행동의(行之) 일이(事) 있지(有) 않고(非, 而) 또한(亦) 어찌(豈) 흐름을(流) 함께해서(同) 더러움(汙)에 합하는(合) 것을(之) 말하겠는가(謂哉)!
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 天下之正道; 庸者, 天下之定理.
자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不偏) 것을(之) 중(中)이라 말하고(謂), 바뀌지 않는(不易) 것을(之) 용(庸)이라 말한다(謂). 중은(中者), 천하의(天下之) 바른(正) 도(道)요; 용은(庸者), 천하의(天下之) 정해진(定) 이치(理)다.
此篇, 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 故筆之於書, 以授孟子.
이 편(책)은(此篇), 바로(乃) 공자 문하(孔門)에서 전하고 받은(傳授) 심법(心法)이다. 자사(子思)가 그것(其)이 오래되면(久而) 어긋날까(差) 걱정했고(恐), 그러므로(故) 그것을(之) 책에(於書) 적어서(筆), 그것으로(以) 맹자에게(孟子) 전수했다(授).
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그 책(其書)이 처음에는(始) 하나의 이치(一理)를 말하고(言), 중간에는(中) 흩어져(散)만 가지 일(萬事)이 되었다가(爲), 마지막에(末) 다시(復) 합쳐서(合) 하나의 이치(一理)가 되었다(爲).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그것을(之) 풀어 놓으면(放則) 육합(천지)(六合)에 가득차고(彌), 그것을(之) 거두면(卷則) 은밀한 곳에(於密) 물러나(退) 숨고(藏), 그(其) 맛이(味) 무공하여(無窮), 모두(皆) 참다운(實) 학문이다(學也).
鄭子曰: “『中庸』一卷書, 自至理便推之於事.
정자가 말하기를: 중용(中庸)이란 한(一) 권의(卷) 책은(書), 지극한(至) 이치(理)로부터(自) 바로(便) 일에(於事) 그것을(之) 미루어나간다(推).
如國家有九經, 及歴代聖人之迹, 莫非實學也.”
국가에(國家) 아홉 개의 법도가(九經) 있고(有), 역대(歴代) 성인의(聖人之) 흔척에(迹) 미치는(及) 것처럼(如), 참다운(實) 학문(學) 아닌(非) 것이 없다(莫也).
善讀者, 玩索而有得焉, 則終身用之, 有不能盡者矣.”
제대로(善) 읽은(讀) 사람이(者), 깊이 생각하고(玩) 찾아서(索而) 거기에서(焉) 얻음이(得) 있다면(有, 則) 종신토록(終身) 그것을(之) 쓰더라도(用), 다할(盡) 수(能) 없는(不) 것이(者) 있다(有矣).
- 玩索(완색) : 글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여 찾음
종신(終身)은 죽을 때까지라는 뜻인데, 중국 사람들은 결혼을 일컬어서 죽을 때까지 치르는 일 가운데서 가장 큰 일이라고 해서 ‘종신대사(終身大事)’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하는 무궁무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 중용의 위대함이다. 여기서 ‘다할 수 없다[不能盡]’는 말은 어떠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발전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발전은 어떤 목적이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목표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용은 목적을 그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 중용의 목표를 우리 생활의 밖에서, 의식의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중용은 우리 삶의 리듬에서 평형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위의 설명처럼 영원할 수밖에 없다.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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