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에게는 공적이 없고, 성인에게는 명성이 없다
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그러므로(故) 무릇(夫) 지혜가(知) 한 관직을 맡아(一官) 공적을 낼만하고(效), 행실은(行) 한 마을의 기대에(一鄕) 들어맞고(比), 덕은(德, 능력은) 한 군주의 뜻에(一君) 맞아서(合而) 한 나라에(一國) 등용된(徵) 사람이(者), 그(其) 자기를 보는 것도(自視也) 또한(亦) 이와 같다(若此矣, 메추라기와 같다).
* 知效一官: 知는 지식. 곧 知가 한 관직을 감당할 만하다, 한 관직에 통달하다는 뜻. 朴世堂은 效를 辦으로 풀이했는데 취할 만한 견해이다.
* 行比一鄕: 행실이 한 고을의 人望에 比合함. 比는 合(《釋文》 李頤) 또는 比合(林希逸, 朴世堂)의 뜻. 임희일은 “그 행실이 한 고을의 人望에 親合해서 사람들을 歸向하게 할 만함을 말한 것이다[言其行可以比合一鄕 而使人歸向也].”라고 풀이했다.
* 德合一君而徵一國者: 德은 능력, 功能의 뜻. 德合一君은 한 나라의 군주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뜻이고, 徵一國은 한 나라에 기용되어 쓰임을 말한다.
* 徵(징): 부르다, 소집하다, 거두다, 구하다, 징계하다, 증명하다, 이루다, 효험.
* 其自視也亦若此矣: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여김이 메추라기와 같을 것이라는 뜻. 곧 ‘知效一官 行比一鄕 德合一君而徵一國’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卑小함을 자각하지 못함을 말한다.
而宋榮子猶然笑之,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定乎內外之分, 辯乎榮辱之竟, 斯已矣.
그런데(而) 송영자는(宋榮子) 빙그레(猶然) 그것을 비웃고(笑之), 또(且) 세상을 들어(擧世而) 그를 칭찬하면서(譽之而) 더욱(加) 힘쓰지 않고(不勸) , 온 세상이(擧世而) 그를 비난하더라도(非之而) 더욱(加) 기죽지 않고(不沮), 내외의 구분을(乎內外之分) 확실하게 하고(定), 영욕의 경계를(乎榮辱之竟) 구분해서(辯), 역시 그러할 뿐이다(斯已矣, 메추라기와 같을 뿐이다).
* 猶然: 웃는 모습. 林希逸, 朴世堂은 ‘웃는 모습[笑貌也]’으로 풀이했다. [중국어 사전: 1. 여전히, 2. 히죽이, 3. 아직도, 4. 미소 짓는 모습]
* 且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擧는 皆와 같다(成玄英). 沮는 ‘풀 죽은 모습[意氣沮喪]’. 加勸, 加沮는 勸‧沮를 加한다는 뜻이지만, 《孟子》 〈梁惠王 上〉의 ‘隣國之民不加少(인국의 민이 더 적어지지 아니하며)’의 경우와 같이 加하다는 동사로 풀이하는 것보다는 ‘더’라는 부사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
* 辯乎榮辱之竟: 辯은 辨의 假借字. 현토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다. 境이 竟으로 된 本도 있다. 경계, 경역의 뜻.
* 斯已矣: 이러할 뿐임. 郭象은 “역시 이에서 지나지 못한다[亦不能復過此].”고 풀이했다. 朴世堂도 “三等人은 榮子의 웃음을 사지만, 영자의 道도 이러할 뿐이니, 역시 이로써 自足하는 자이다[三等人乃榮子所笑 而榮子之道 又如斯而已 則亦以此自足者].”라고 풀이했다.
彼其於世, 未數數然也. 雖然, 猶有未樹也.
저(彼) 그가(其) 세상에 대해서(於世), 급급해하지(數數然也) 않는다(未). 비록 그렇지만(雖然), 아직(猶) 수립하지 못한 것이(未樹) 있다(有也).
* 未數數然也: 급급해하지 않음. 곧 세상의 평가에 대해 초연하다는 뜻. 數數는 ‘급급하다[汲汲也]’(《釋文》 司馬彪, 成玄英) 또는 ‘촉박하다는 뜻[迫促意也]’(《釋文》 崔譔), 급히 서둔다, 허둥지둥한다, 악착스럽다는 뜻이다. 然은 상태를 나타내는 語助辭. 여기서는 未數數然을 악착스럽지 않다, 超然하다로 풀이한다.
* 猶有未樹也: 여전히 수립되지 못함. 猶는 아직, 오히려, 여전히의 뜻, 未樹는 수립되지 않았다는 뜻.
夫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 旬有五日而後反. 彼於致福者, 未數數然也.
저(夫) 열자는(列子) 바람을(風) 몰아서(御而, 조종해서) 다니고(行), 경쾌하게(泠然) 잘 <날아> 다니다가(善也), 15일이(旬有五日) 지나서(而後) 돌아온다(反). 그가(彼) 복을 구하는 것에(致福者) 대해서는(於), 악착스럽지 않다(未數數然也, 초연하다).
* 泠然: [중국어 사전 1. 졸졸, 2. 맑고 시원한 모양, 3. 소리가 깨끗한 모양, 4. 경쾌한 모양, 5.5. 깨닫다] / 가뿐가뿐 즐겁게 잘 날아다님. 泠은 가벼운 모양. 여기서는 곽상이 경묘한 모양[輕妙之貌]으로 풀이한 견해를 따랐다. 朴世堂도 같은 견해. 善은 잘 날아다닌다는 뜻인데 朴世堂은 “善은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말함이다[善謂心樂之也].”라고 부언했다.
* 旬有五日而後反: 15일이 지난 뒤에 땅 위로 돌아옴. 旬은 열흘. 有는 又와 같은 뜻. 旬有五日은 10일 하고도 또 5일, 즉 15일을 말한다.
* 致福者: 복을 구함. 致福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林希逸은 求福으로 보았다.
此雖免乎行, 猶有所待者也.
이 사람이(此) 비록(雖) 걸어 다니는 <번거로움>에서는(乎行) 벗어났지만(免), 오히려(猶) 기대는(待, 의지해야 하는) 것(所者)이 있다(有也).
若夫乘天地之正, 而御六氣之辯, 以遊無窮者, 彼且惡乎待哉!
만약(若) 저(夫) 천지의(天地之) 바른 기운을(正) 타고서(乘, 而) 육기의(六氣之) 변화를(辯) 몰아서(御, 以) 무궁한 곳에서(無窮) 노는 사람이라면(遊者), 저이가(彼) 또(且) 무엇에(惡乎) 의지하겠는가(待哉)!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
그래서 말하기를(故曰): 지고한 사람에게는(至人) 자기가 없고(無己), 신인에게는(神人) 공적이 없고(無功), 성인에게는(聖人) 명성이 없다(無名)라고 한다.
<출처: 동양고전번역서 장자, 동양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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