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가 통달했다고 말하려면
子張問: “士何如斯可謂之達矣?”(사하여사가위지달의)
자장이 묻기를: 선비가(士) 어찌 한다면(何如斯) 그(之)를 통달했다고(達) 말할(謂) 수 있을까요(可-矣)?”
- 士何如斯可謂之達矣: '斯'는 '~하면 그제야'라는 뜻으로 조건에 따른 결과를 표시하는 접속사더. 원래 '이렇게 되면'이라는 뜻으로 문맥에 따라 '~하면 곧' 또는 '~하면 그제야'라는 어감을 가진다. (논어의 문법적 이해, 류종목)
達者, 德孚於人而行無不得之謂.
달자(達者)는, 덕이(德) 사람들에게(於人) 믿음을 주고(孚而) 행동에(行) 얻지 못하는(不得) 것이 없음을(無之) 말한다(謂).
子曰: “何哉, 爾所謂達者?”(하재 이소위달자)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엇인가(何哉), 네가(爾) 이른바(所謂) 통달했다는(達) 것이(者)?
子張務外, 夫子蓋已知其發問之意. 故反詰之, 將以發其病而藥之也.
자장(子張)이 드러난 것(外)에 힘쓰고(務), 선생님이(夫子) 아마도(蓋) 이미(已) 그(其) 질문을 한(發問之) 뜻(意)을 알았다(知). 그러므로(故) 그것을(之) 반대로 물어서(反詰), 장차(將) 그것으로(以) 그 병통을(其病) 드러나게 하고(發而) 그것을(之) 고쳤다(藥也).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재방필문 재가필문)
자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라에 있어서(在邦) 반드시(必) 소문(명성)(聞)이 나고, 집안에 있어서(在家) 반드시(必) 소문(명성)(聞) 나는 것입니다.
- 在家必聞: '家'를 자기 집안이 아니라 식읍을 가진 대분의 집안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논어의 문법적 이해, 류종목)
言名譽著聞也. 명예가 드러나 소문남을 말한다.
子曰: “是聞也, 非達也.(시문야 비달야)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것(是)은 소문(명성)이고(聞也), 통달함이(達) 아니다(非也).
聞與達相似而不同, 乃誠僞之所以分, 學者不可不審也. 故夫子旣明辨之, 下文又詳言之.
문과(聞與) 달(達)이 서로(相) 비슷하지만(似而) 같지 않으니(不同), 곧(乃) 진실함과 거짓됨(誠僞)이(之) 나뉘는(分) 까닭이어서(所以), 학자(學者)가 살필 않음(不審)이 불가하다(不可也). 그러므로(故) 선생님이(夫子) 이미(旣) 그것을(之) 밝게 구분하고(明辨), 다음 글에서(下文) 또(又) 그것을(之) 자세히 말했다(詳言).
夫達也者(부달야자), 質直而好義(질직이호의), 察言而觀色(찰언이관색), 慮以下人(려이하인). 在邦必達(재방필달), 在家必達(재가필달).
대저(夫) 통달이란(達也) 것(者)은, 질박하고(質) 정직하며(直而) 의를 좋아하고(好義), 말을 살피고(察言而) 얼굴빛을 보아(觀色), 생각함으로(慮以) 남에게(人) <나를> 낮춤이다(下). 나라에서(在邦) 반드시(必) 통달하고(達), 집안에서(在家) 반드시(必) 통달한다(達).
○ 內主忠信, 而所行合宜, 審於接物而卑以自牧, 皆自修於內, 不求人知之事. 然德修於己而人信之, 則所行自無窒礙矣.
안으로(內) 충신을(忠信) 주로하고(主, 而) 행하는 것이(所行) 마땅함에 합하고(合宜), 남을 접하는데(於接物) 살피고(審而) 낮춤으로써(卑以) 자신(自)을 기르는(牧) 것이, 모두(皆) 안에서(於內) 자기를 닦음(自修)이고, 不求남이(人) 알아주기(知)를 구하지 않는(不求之) 일이다(事). 그러나(然) 덕이(德) 자기에게(於己) 닦여서(修而) 사람들이(人) 그것을 믿는다면(信之, 則) 행하는 것(所行)이 저절로(自) 막힘이(窒礙) 없다(無矣).
夫聞也者(부문야자), 色取仁而行違(색취인이행달), 居之不疑(거지불의). 在邦必聞(재방필문), 在家必聞(재가필문).”
무릇(夫) 문이란(聞也) 것(者)은, 얼굴빛이(色) 인을 취하지만(取仁而) 행동은(行) 어긋나서(違), 그것에 머물면서도(居之) 의심하지 않는다(不疑). 나라에 있어도(在邦) 반드시(必) 소문이(聞) 있고, 집에 있어도(在家) 반드시(必) 소문이(聞) 있다.”
○ 善其顔色以取於仁, 而行實背之, 又自以爲是而無所忌憚. 此不務實而專務求名者, 故虛譽雖隆而實德則病矣.
그(其) 안색으로(顔色以) 인을(於仁) 잘하지만(善, 而) 행실이(行實) 그것을(之) 배반하고(背), 또(又) 스스로(自) 옳다고(是) 여겨서(以爲而) 꺼리는 것(所忌憚)이 없다(無). 이것은(此) 실질에(實) 힘쓰지 않고(不務而) 오로지(專) 이름을 얻는데(求名) 힘쓰는(務) 것이고(者), 그러므로(故) 빈 명예가(虛譽) 비록(雖) 올라가더라도(隆而) 실질적인 덕(實德) 으로 말하자면(則) 병든(病) 것이다(矣).
○ 程子曰: “學者須是務實, 不要近名. 有意近名, 大本已失, 更學何事? 爲名而學, 則是僞也.
배우는 자(學者)는 모름지기(須) 실질에 힘씀이(務實) 옳고(是), 명성을(名) 가까이 하지(近) 말아야 한다(不要). 명성을 가까이함(近名)에 뜻이(意) 있으면(有), 큰 근본이(大本) 이미(已) 없어지니(失), 다시(更) 무슨 일을(何事) 배우겠는가(學)? 명성을 위해서(爲名而) 배운다면(學, 則) 이것은(是) 거짓이다(僞也).
今之學者, 大抵爲名. 爲名與爲利雖淸濁不同, 然其利心則一也.”
지금의(今之) 학자(學者)가, 대체로(大抵) 명성을 위한다(爲名). 명성을 위함과(爲名與) 이익을 위함(爲利)이 비록(雖) 청탁이(淸濁) 같지 않지만(不同), 그러나(然) 그(其) 이익의 마음(利心) 이라면(則) 같다(一也).”
尹氏曰: “子張之學, 病在乎不務實. 故孔子告之, 皆篤實之事, 充乎內而發乎外者也.
윤씨가 말하기를: 자장의(子張之) 배움(學)이, 병통이(病) 실제(務)를 힘쓰지 않음에(乎不實) 있다(在). 그러므로(故) 공자가(孔子) 그에게(之) 일러준(告) 것이, 모두(皆) 독실의(篤實之) 일이고(事), 안에서(乎內) 채우고(充而) 바깥에(乎外) 드러나는(發) 것이다(者也).
當時門人親受聖人之敎, 而差失有如此者, 況後世乎?”
당시의(當時) 문인이(門人) 직접(親) 성인의 가르침을(聖人之敎) 받았지만(受, 而) 잘못됨이(差失) 이와 같은(如此) 것(者)이 있으니(有), 하물며(況) 후세는(後世) 어떠한가(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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