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가 아니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하지 않는다
顔淵問仁. (안연문인) 안연이(顔淵) 인을(仁) 물었다(問).
仁者, 本心之全德. 인이란 것은(仁者), 본심의(本心之) 온전한(全) 덕이다(德).
子曰: “克己復禮爲仁. (극기복례위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이기고(克己) 예로 돌아가는(復禮) 것이 인을 행하는(爲仁) 것이다.
克, 勝也. 己, 謂身之私欲也. 復, 反也. 禮者, 天理之節文也.
극(克)은, 이김이다(勝也). 기(己)는, 자기의(身之) 사욕을(私欲) 말한다(謂也). 복(復)은, 돌아감이다(反也). 예(禮)란 것은(者), 천리의(天理之) 절문이다(節文也).
爲仁者, 所以全其心之德也. 蓋心之全德, 莫非天理, 而亦不能不壞於人欲.
인을 행함은(爲仁者), 그(其) 마음의(心之) 덕(德)을 온전하게(全) 하는 것이다(所以-也). 대체로(蓋) 마음의(心之) 온전한(全) 덕(德)은, 천리(天理) 아님(非)이 없으나(莫, 而) 또한(亦) 인욕에(於人欲) 무너지지 않을(不壞) 수 없다(不能).
故爲仁者必有以勝私欲而復於禮, 則事皆天理, 而本心之德復全於我矣.
그러므로(故) 인을 행하는(爲仁) 것은(者) 반드시(必) 사욕(私欲)을 이길(勝) 수 있어서(有以而) 예로(於禮) 돌아간다면(復, 則) 일이(事) 모두(皆) 천리가 되고(天理, 而) 본심의(本心之) 덕이(德) 다시(復) 나에게(於我) 온전하게 된다(全矣).
一日克己復禮(일일극기복례), 天下歸仁焉(천하귀인언). 爲仁由己(위인유기), 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
하루(一日) 자기 <사욕>을 이기고(克己) 예로 돌아가면(復禮), 천하가(天下) 인을(仁) 이 사람에게(焉) 귀속시킨다(歸). 인을 행함이(爲仁) 나에게서 말미암으니(由己, 而) 남에게서 말미암았(由人)겠는가(乎哉)?
- 天下歸仁焉: '焉'은 '於是'이고 여기서 '是'는 '一日克己復禮'를 실천한 사람을 말한다. 주자는 '歸'를 '허여함'으로 해석했는데, 원래 뜻을 살려서 '귀속시키다, 돌리다'로 해석해도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논어의 문법적 이해, 류종목)
-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원래 '爲仁由己而不由人'이란 문장인데, '不由人'을 강조하려고 반문형으로 바꾸면서 '而'의 쓰임이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원래 문장을 보면 역접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由'는 '말미암다(이유/까닭이 되다)는 기본 뜻이지만 여기서는 '달려있다'로 의역할 수 있다.
歸, 猶與也. 又言一日克己復禮, 則天下之人皆與其仁, 極言其效之甚速而至大也.
귀(歸)는, 허여하다와 같다(猶與也). 또(又) 하루 극기복례하면(一日克己復禮, 則) 천하의(天下之) 사람이(人) 모두(皆) 그 인을(其仁) 인정한다(與)는 말이니(言), 그(其) 효과가(效之) 매우(甚) 빠르고(速而) 지극히(至) 큰(大) 것을 극단적으로 말했다(極言也).
又言爲仁由己而非他人所能預, 又見其機之在我而無難也.
또(又) 인을 실천함이(爲仁) 나에게서 말미암고(由己而) 타인이(他人) 관계할 것(所能預)이 아니라고(非) 말하고(言), 또(又) 그(其) 기틀이(機之) 나에게(我) 있고(在而) 어려움이(難) 없음(無)을 보여주었다(見也).
日日克之, 不以爲難, 則私欲淨盡, 天理流行, 而仁不可勝用矣.
날마다(日日) 그것(之, 사욕)을 이기고(克), 어렵게(難) 여기지(以爲) 않는다면(不, 則) 사욕(私欲)이 깨끗하게(淨) 사라지고(盡), 천리가(天理) 유행하고(流行, 而) 인(仁)을 모두(勝) 쓸(用) 수 없다(不可-矣).
程子曰: “非禮處便是私意. 旣是私意, 如何得仁? 須是克盡己私, 皆歸於禮, 方始是仁.”
정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님에(非禮) 처하는(處) 것이 바로(便) 이것이(是) 사의다(私意). 이미(旣) 이것이(是) 사의면(私意), 어떻게(如何) 인을 얻겠는가(得仁)? 모름지기(須) 이(是) 자기 사의를(己私) 이겨(克) 다해서(盡), 모두(皆) 예에(於禮) 돌아가면(歸), 方始是仁.”
又曰: “克己復禮, 則事事皆仁, 故曰天下歸仁.”
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則) 일마다(事事) 모두(皆) 인이고(仁), 그러므로(故) 천하가(天下) 인을(仁) 귀속시킨다고(歸) 말한다(曰).
謝氏曰: “克己, 須從性偏難克處, 克將去.”
사씨가 말하기를: 극기(克己)는, 모름지기(須) 從性偏難克處, 克將去.”
顔淵曰: “請問其目.” (청문기목) 안연이 말하기를: 청컨대(請) 그(其) 조목(目)을 묻습니다(問).
- 請은 '청컨대'라는 뜻의 부사로 썼다.
目, 條件也. 顔淵聞夫子之言, 則於天理人欲之際, 已判然矣, 故不復有所疑問, 而直請其條目也.
목(目)은, 조건이다(條件也). 안연이(顔淵) 부자의 말을(夫子之言) 듣고서(聞), 곧(則) 천리와 인욕의(天理人欲之) 즈음에(於際), 이미(已) 환하게 판명되었고(判然矣), 그러므로(故) 다시(復) 의문 나는 것이(所疑問) 있지(有) 않아서(不, 而) 바로(直) 그(其) 조목(條目)을 청했다(請也).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가 아니면(非禮) 보지 말고(勿視), 예가 아니면(非禮) 듣지 말고(勿聽), 예가 아니면(非禮) 말하지 말고(勿言), 예가 아니면(非禮) 하지 말라(勿動).”
非禮者, 己之私也. 勿者, 禁止之辭. 是人心之所以爲主, 而勝私復禮之機也. 私勝, 則動容周旋無不中禮, 而日用之間, 莫非天理之流行矣.
비례(非禮)란 것(者)은, 자기의(己之) 사사로움이다(私也). 물이란(勿) 것은(者), 금지하는(禁止之) 말이다(辭). 이것이(是) 사람 마음이(人心之)所以주가 되어서(爲主, 而) 사욕을 이기고(勝私) 예로 돌아가는(復禮之) 기틀이다(機也). 사가 이기면(私勝, 則) 몸가짐(動容)과 일을 대하는 태도(周旋)가 예에 맞지(中禮) 않음(不)이 없고(無, 而) 매일 쓰는(日用之) 사이에(間), 천리의(天理之) 유행(流行) 아닌(非) 것이 없다(莫矣).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회수불민 청사사어의)
안연이 말하기를: 회(回)가 비록(雖) 불민하지만(不敏), 모쪼록(請) 이 말에(斯語) 종사하겠습니다(矣, 힘쓰겠습니다).
事, 如事事之事. 請事斯語, 顔子黙識其理, 又自知其力有以勝之, 故直以爲己任而不疑也.
사(事)는, 일에 종사하다의(事事之) 사와(事) 같다(如). 청사사어(請事斯語)는, 안자가(顔子) 그 이치를(其理) 묵묵히 알고(黙識), 또(又) 그(其) 힘이(力) 그것을(之) 이길(勝) 수 있음(有以)을 스스로 알고(自知), 그러므로(故) 바로(直) 자기 임무로(己任) 여기고(以爲而) 의심하지 않았다(不疑也).
○ 程子曰: “顔淵問克己復禮之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四者身之用也.
정자가 말하기를: 안연이(顔淵) 극기복례의(克己復禮之) 조건(目)을 물었다(問), 선생님이(子),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고 했다(曰), 네 가지가(四者) 몸의(身之) 사용이다(用也).
由乎中而應乎外, 制於外所以養其中也. 顔淵事斯語, 所以進於聖人.
마음에서(乎中) 말미암아(由而) 밖에서(乎外) 응답하니(應), 밖에서(於外) 제어함이(制) 그 마음을(其中) 기르는(養) 방법이다(所以也). 안연이(顔淵) 이 말을(斯語) 일삼은(事) 것은, 성인에(於聖人) 나아간(進) 까닭이다(所以).
後之學聖人者, 宜服膺而勿失也, 因箴以自警.
뒤의(後之) 성인을 배우는(學聖人) 사람이(者), 마땅히(宜) 가슴에 품고(服膺而) 잃지 말아야 하고(勿失也), 인하여(因) 경계로 삼아(箴以) 자기를(自) 경계한다(警).
其視箴曰: ‘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己復禮, 久而誠矣.’
其聽箴曰: ‘人有秉彝,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其言箴曰: ‘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惟其所召. 傷易則誕, 傷煩則支, 己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欽哉訓辭!’
其動箴曰: ‘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愚按: 此章問答, 乃傳授心法切要之言. 非至明不能察其幾, 非至健不能致其決. 故惟顔子得聞之, 而凡學者亦不可以不勉也. 程子之箴, 發明親切, 學者尤宜深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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