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游爲武城宰. 子曰: “女得人焉爾乎?” (자유위무성재 자왈 여득인언이호)
자유가(子游) 무성의(武城) 읍재(宰)가 되었다(爲).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女) 여기서(焉爾) 사람(人)을 얻었느냐(得乎)?
- 焉爾는 於此(어차), 於是(어시)와 같다. 焉(언)은 장소를 표시하는 전치사인 於(어)와 같다. 爾를 '그곳'으로 본다. 다른 해석 방법으로는 焉은 '於之'의 줄임말로 보고, '之'는 무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 武城, 魯下邑. 무성은(武城), 노나라(魯) 하읍이다(下邑).
曰: “有澹臺滅明者(유담대멸명자), 行不由徑(행불유경). 非公事(비공사), 未嘗至於偃之室也(미상지어언지실야).”
말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者) 있는데(有), 길을 갈(行) 때도 지름길(徑)을 거치지 않고(不由). 공사(公事)가 아니면(非), 일찍이(嘗) 언의 집에(於偃之室) 들른(至) 적이 없습니다(未-也).
澹臺姓, 滅明名, 字子羽. 徑, 路之小而捷者. 公事, 如飮射讀法之類.
담대는(澹臺) 성이고(姓), 멸명은(滅明) 이름이고(名), 자는(字) 자우다(子羽). 경(徑)은, 길이(路之) 작고(小而) 빠른(捷) 것이다(者). 공사(公事)는, 향음주(飮), 향사례(射) 독법(讀法之) 따위(類) 같은(如) 것이다.
不由徑, 則動必以正, 而無見小欲速之意可知. 非公事不見邑宰, 則其有以自守, 而無枉己殉人之私可見矣.
지름길을(徑) 거치지(由) 않으면(不, 則) 움직임이(動) 반드시(必) 바르기 때문에(以正), 그래서(而) 작은 것을 보고(見小) 빨리 하려는(欲速之) 뜻이(意) 없음을(無) 알 수 있다(可知). 공사가(公事) 아니면(非) 읍재를(邑宰) 보지 않으면(不見, 則) 그가(其) 자기를 지킬(自守) 수 있고(有以), 그래서(而) 자기를 굽혀서(枉己) 남을 따르는(殉人之) 사사로움이(私) 없음을(無) 볼 수 있다(可見矣).
○ 楊氏曰: “爲政以人才爲先, 故孔子以得人爲問. 如滅明者, 觀其二事之小, 而其正大之情可見矣.
양씨가 말하기를: 정치함은(爲政) 인재 <얻기>로써(以人才) 우선을 삼고(爲先), 그러므로(故) 공자가(孔子) 사람을 얻었는가로써(以得人) 물었다(爲問). 멸명과 같은(如滅明) 사람은(者), 그(其) 두 가지(二事之) 작은 것(小)을 보면(觀, 而) 그(其) 바르고 큰(正大之) 마음(情)을 볼 수 있다(可見矣).
後世有不由徑者, 人必以爲迂; 不至其室, 人必以爲簡. 非孔氏之徒, 其孰能知而取之?”
후세에(後世) 지름길을 다니지(由徑) 않는(不) 사람이(者) 있다면(有), 사람이(人) 반드시(必) 우활하다(迂) 여기고(以爲); 그 방에(其室) 오지 않으면(不至), 사람이(人) 반드시(必) 거만하다(簡) 여기고(以爲). 공씨의(孔氏之) 무리가(徒) 아니라면(非), 그(其) 누가(孰) 알 수 있어(能知而) 그것을 취하겠는가(取之)?
愚謂持身以滅明爲法, 則無苟賤之羞; 取人以子游爲法, 則無邪媚之惑.
내가 생각건대(愚謂) 몸가짐에(持身) 멸명으로(以滅明) 법을 삼으면(爲法, 則) 구차하고(苟) 천한(賤之) 부끄러움이(羞) 없고(無); 사람을 취하는데(取人) 자유로써(以子游) 법을 삼으면(爲法, 則) 올바르지 못함과(邪) 아첨의(媚之) 미혹이(惑) 없다(無).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된 것은 애공 12년(BC 483) 전후의 일로, 공자의 나이 69세 전후였다. 자유는 문학, 즉 문자에 밝았고, 남달리 예약에 밝았다. 그는 무성의 읍재로 공자의 예악사상을 현실사회에 적용해서 유토피아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어린 제자가 어떤 정치를 펼치고 있는지 궁금했던 공자는 자유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자유를 만난 공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았느냐?'
공자의 물음에 자유는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네 있습니다. 담대멸명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담대멸명은 무성 사람으로 자유가 발굴한 인물이다. 가어에는 담대멸명을 군자의 풍도가 느껴지는 잘생긴 모습이었고, 사람이 공정하고 사특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열전의 담대멸명조에 따르면, 담대멸명은 제자를 3백 명이나 거느리고 양자강 남쪽까지 주유했다고 한다. 담대멸명의 나이를 볼 때, 이런 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공자가 죽인 뒤일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자학단의 성장과 발전이다. 공자학단의 제자들은 노나라에도 머물렀지만, 공자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자의 학문이 오나라나 초나라까지 가서 뿌리를 내렸다. <김용옥, 논어 한글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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