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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집주 학이(學而) 1-6] 효도와 공손함은 젊은이의 덕목이다 / 제자입즉효 출즉제(弟子入則孝 出則弟)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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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弟子入則孝(제자입즉효), 出則弟(출즉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젊은이는(弟子) <집에> 들어가면(入則) 효도하고(孝), <집을> 나가면(出則) <어른에게> 공손하고(弟),

 

* 入則孝 出則弟 : A則B는 'A이면 B이다, A 하면 B 하다'의 문형이다. 則(곧 즉): ~하면 곧. 조건에 따른 결과를 표시하는 접속사로 卽(즉)과 같다. [, .(생각하면 사리를 알게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리를 알지 못한다.) <孟 上>]

 

* 제弟는 반드시 형제 사이의 관계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효가 수직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이라고 한다면 제는 수평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이라 본다. 물론 그 출반은 형제 사이의 우애다(논어 한글역주, 김용옥). '부모와 형제를 잘 섬긴다'는 뜻의 '孝悌'의 '제悌'를 논어에서는 모두 '제弟'로 쓴다. 당시에는 아직 '제悌'자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형제의 '제弟'자를 빌려 썼다(주주금석 논어, 김도련)

 

○ 謹者, 行之有常也.  근은(謹者), 행동이(行之) 변치 않음이(常, 떳떳함) 있음이다(有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동을> 삼가고(謹而) <말을> 미덥게 하고(信), 널리(汎) 사람을 사랑하고(愛衆), 어진이(仁)를 가까이해라(親).

 

信者, 言之有實也. 汎, 廣也. 衆, 謂衆人. 親, 近也. 仁, 謂仁者.

신(信)은, 말이(言之) 알맹이를(實) 가진 것이다(有也). 범(汎)은, 넓음(廣)이다(也). 중(衆)은, 여러 사람(衆人)을 말한다(謂). 친(親)은, 가까이함(近)이다(也). 인(仁)은, 인한 사람(仁者)이다.

 

行有餘力(행유여력), 則以學文(즉이학문).

실천하고(行) 남은 힘(餘力)이 있으면(有-則), 그것으로써(以) 글을(文) 배워라(學).

 

* 行有餘力, 則以學文 : A以B는 'A로 B해라'로 해석하는 문형이다. 以學文(이학문)은 그것으로써, 즉 여력을 이용하여 글을 배우다. 전치사 以(이) 다음에 목적어 之(지)가 생략된 형태이다. '以(이)' '與(여)' '爲(위)' 따위의 전치사는 왕왕 그다음에 오는 목적어가 생략된다. [旦日, 客從外來, 與坐談.(이튿날 바깥에서 손님이 와서 그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戰國策 齊策>] <논어의 문법적 이해, 류종목>

 

* 學文(학문) : '學文'은 글을 배우는 것이다. 주자는 詩書와 六藝의 文이라고 풀었다. 국어사전에서도 주자와 비슷하게 시서, 육예를 배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學問(학문)'은 그 의미가 다르다. 이 말은 주역에서 처음 나오는데, '배워서 무엇인가를 모으고, 물어서 변별하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의 학문은 '어떤 분야를 배워서 체계적으로 익힘'이라는 의미다.

 

* 이 장의 핵심은 '行有餘力, 則以學文'이다. 행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학문하라는 말을 반드시 시간적 선후 관계로 파악하면 안 된다. 이것은 배우는 것과 일상적 덕목의 실천 사이에서, 즉 학과 행 사이에서 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말이다. (논어한글역주, 김용옥)

 

餘力, 猶言暇日. 以, 用也. 文, 謂詩書六藝之文.

여력(餘力)은, 한가한 날(暇日)을 말함(言)과 같다(猶). 이(以)는, 씀이다(用也). 문(文)은, 시서육예의(詩書六藝之) 글(文)을 말한다(謂).

 

○ 程子曰: “爲弟子之職, 力有餘則學文, 不修其職而先文, 非爲己之學也.”

정자가 말하기를: 제자의(弟子之) 직분(職)을 하고(爲), 힘(力)에 남음(餘)이 있다면(有則) 글을 배우지만(學文), 그 직분(其職)을 닦지(修) 않고서(不而) 글을 먼저 배우면(先文), 자기를 위한(爲己之) 학문(學)이 아니다(非也).

 

尹氏曰: “德行, 本也. 文藝, 末也. 窮其本末, 知所先後, 可以入德矣.”

윤씨왈: 덕행(德行)이, 근본이다(本也). 문예(文藝)는, 말단이다(末也). 그 근본과 말단(其本末)을 궁구해서(窮),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所先後)을 알면(知), 그것으로써(以) 덕에(德) 들어갈(入) 수(可) 있다(矣).

 

洪氏曰: “未有餘力而學文, 則文滅其質; 

홍씨왈: 여력(餘力)이 있지(有) 않은데도(未而) 글을 배우면(學文則) 문(文)이 그 질(其質)을 없애고(滅); 

 

有餘力而不學文, 則質勝而野.”

여력(餘力)이 있는데도(有而) 글을 배우지(學文) 않으면(不則) 질(質) 이기고(勝而) 야하다(野).

 

愚謂力行而不學文, 則無以考聖賢之成法, 識事理之當然, 而所行或出於私意, 非但失之於野而已.

내가 생각하기에, 실천만 힘쓰고(力行而) 문을 배우지(學文) 않으면(則), 성현의(聖賢之) 이루어진 법(成法)을 상고하고(考) 수 없고(無以), 사리의(事理之) 당연함(當然)을 알(識) 수 없어서(無以而),

 

而所行或出於私意, 非但失之於野而已.

행동하는 것(所行)이 간혹(或) 사의에서(於私意) 나올(出) 수도 있으니, 단지(但) 잃음이(失之) 야(野)해짐 뿐만이 아니다(非). (야한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공자의 어투는 상당히 반주지주의적이고, 배운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을 야단치고 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제자들이여! 인터넷에서 항해하기 위해서 문자를 배운 것이 아니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손한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정도이다.  【김용옥, 논어 한글 역주 1, 31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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