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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공부/중용자잠(中庸自箴)

[여유당전서 중용자잠(中庸自箴 ) 1-5]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이고 드러나 절도에 맞으면 화다 /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by ഗൗതമബുദ്ധൻ 2023.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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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군자와 존심양성의 지극한 공부는 중과 화를 이루는 공부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喜怒哀樂之未發), 중이라 말하고(謂之中), 일어나서(發而) 모두(皆) 절도에 맞는 것을(中節), 화라 말한다(謂之和). 중이란(中也者), 천하의 (天下之) 큰 근본이다(大本也). 화란(和也者), 천하의(天下之) 함께하는 도리다(達道也). 중화를 지극하게 하면( 致中和), 천지가(天地) 제자리를 잡고(位焉), 만물이(萬物) 자라난다(育焉).


箴曰 此節, 卽愼獨君子存心養性之極功, 非通論天下人之性情也. 何以知其然也? 上節曰‘君子戒愼’, 曰‘君子愼獨'. 下節曰‘君子中庸’, 曰‘君子時中’, 此節承上接下, 而忽論天下人之性情, 必無是理. 其爲愼獨君子之成德人, 何疑乎?

箴曰 이 절은(此節), 바로(卽) 신독군자와(愼獨君子) 존심양성의(存心養性之) 지극한 공부(極功)를 말했고, 천하사람의(天下人之) 성정을(性情) 통론한 것이 아니다(非通論也). 어째서(何以) 그런가를(其然) 아는가(也)? 윗절에서 (上節) 군자계신을 말하고(曰‘君子戒愼’), 군자신독을 말했다(曰‘君子愼獨'). 아랫절에서(下節) 군자중용을 말하고(曰‘君子中庸’), 군자시중을 말했고(曰‘君子時中’), 이 절이(此節) 위를 이어받아(承上) 아래로 잇다가(接下, 而) 갑자기(忽) 천하사람의 성정을 논했으니(論天下人之性情), 반드시(必) 이런 이치가 없다(無是理). 그(其) 신독군자가(爲愼獨君子之) 덕을 이룬 사람이(成德人) 됨을, 어찌(何) 의심하겠는가(疑乎)?   

 

○何以明其然也? 愼獨者, 誠也. 下章曰: "惟天下至誠, 爲能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夫焉有所倚." 其所謂‘立天下之大本’者, 致中和也, 其所謂‘知天地之化育’者, 天地位而萬物育也, 其所謂‘夫焉有所倚’者, 贊美中和之德也. 

○무엇으로(何以) 그러한 것을(其然) 밝힐 수 있는가(也)? 신독이란(愼獨者), 성이다(誠也). 아랫장에 말하길(下章曰): "오직(惟) 천하의(天下) 지극한 성이(至誠), 천하의 근본을(天下之大本) 서게 할 수 있고(爲能立), 천지의 화육을(天地之化育) 알 수 있으니(知), 어찌(夫焉) 의지하는 것이 있는가(有所倚)." 그(其) 이른바(所謂) 천지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란(‘立天下之大本’者), 중과 화를 지극하게 함이고(致中和也), 그(其) 이른바(所謂) 천지의 화육을 안다는 것은(‘知天地之化育’者), 천지가 자리 잡아서(天地位而) 만물이 크는 것이니(萬物育也), 그(其) 이른바(所謂) 어찌 의지할 것이 있는가란 것은(‘夫焉有所倚’者), 중과 화의 적을(中和之德) 찬미한 것이다(贊美也).

 

此章ㆍ下章, 上下照應, 毫髮不差. 愼獨之爲至誠, 至誠之爲愼獨, 旣然無疑, 則未發之中ㆍ已發之和, 惟愼獨者當之, 不能愼獨者, 方其未發之時, 心術先已邪辟, 及其旣發之後, 行事又復偏陂, 安得以中和二字許之於此人乎? 況致中和則天地位焉, 萬物育焉, 明中和二字爲聖人之極功, 安得爲衆人之所與乎? 

이 장과(此章) 아랫장은(下章), 상하가(上下) 조응해서(照應), 털끝만큼의(毫髮) 차이도 없다(不差). 신독이(愼獨之) 지성이 되는 것과(爲至誠), 지성이(至誠之) 신독이 되는 것은(爲愼獨), 이미 그러한 것에(旣然) 의심이 없으니(無疑, 則) 미발의 중과(未發之中) 이발의 화는(已發之和), 오직(惟) 신독자만이(愼獨者) 해당하고(當之), 신독 할 수 없는 사람은(不能愼獨者), 바야흐로(方) 그 미발하는 때에(其未發之時, 사물을 접촉하기 이전에), 마음 쓰는 것이(心術) 이미(先已) 사악하고 편벽하며(邪辟), 그(其) 기발지후에 이르러서는(旣發之後), 일을 행하는 것도(行事) 또한(又) 다시(復) 편벽되니(偏陂), 어찌(安) 중과 화 두 글자를(中和二字) 이 사람에게(於此人) 허용할 수 있는가(得以許之乎? 하물며(況)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致中和則)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天地位焉), 만물이 자라는 것은(萬物育焉), 중화 두 글자가(中和二字) 성인의 지극한 공덕이 됨을(爲聖人之極功) 밝혀주니(明), 어찌(安) 많은 사람이(衆人之) 참여할 수 있는 것이(所與) 되겠는가(得爲乎)?

 

若云已發有善惡, 未發無善惡, 則是衆人雖不能皆和, 未嘗不皆中, 雖不能致和, 未嘗不致中. 小人ㆍ君子, 其將分據位育之功, 而可通乎? 

만약(若) 이발에(已發) 선악이 있고(有善惡), 미발에(未發) 선악이 없다고(無善惡) 말한다면(, 則) 이것은(是) 많은 사람이(衆人) 비록(雖) 모두(皆) 화를 얻을 수 없지만(不能和), 일찍이(嘗) 모두가() 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不中), 비록(雖) 화를 다할 수 없더라도(不能致和), 일찍이 중을 지극하게 하지 못한 적이 없다(未嘗不致中). 소인과 군자가(小人君子), 그(其) 장차(將) 지위에 근거해서 양육하는 공을(據位育之功) 나눌 수 있다면(, 而) 통하는 것이겠는가(可通乎)? 

 

○愼獨之能致中和, 何也? 未發者, 喜怒哀樂之未發, 非心知思慮之未發. 當此之時, 小心翼翼, 昭事上帝, 常若神明照臨屋漏, 戒愼恐懼, 惟恐有過, 矯激之行, 偏倚之情, 惟恐有犯, 惟恐有萌, 持其心至平, 處其心至正, 以待外物之至, 斯豈非天下之至中乎? 

○신독이(愼獨之) 중화를 지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能致中和), 어째서인가(何也)? 미발이란(未發者), 희로애락이(喜怒哀樂之)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未發), 마음의 지각과 사려가(心知思慮之) 미발한 것이 아니다(未發). 이것을 당한 때에(當此之時), 마음을 작게 하여(小心) 조심하고 근신하여(翼翼), 밝게(昭) 상제를 섬기고(事上帝), 늘(常) 신명이(神明) 방구석을( 屋漏) 굽어보는(照臨) 것처럼(若), 계신공구하여(戒愼恐懼), 오직(惟) 잘못이 있을까(有過) 두려워하고(恐), 과격하게(矯激之) 행동할까(行) 두려워하고, 치우친 감정이 있을까(偏倚之情) 두려워하고, 오직(惟) 범하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恐有犯), 오직(惟) 싹트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恐有萌), 그 마음이(其心) 지극히 평온하게(至平) 유지하고(持), 그 마음이(其心) 지극히 공정하게(至正) 처하여(, 以) 외물이 오는 것을(外物之至) 대처하면(待), 이것이(斯) 어찌(豈) 천하의(天下之) 지극한 중이(至中) 아니겠는가(乎)?

* 翼翼(익익)→翊翊(익익): 1. 조심()하는 모양(), 2. 근신()하는 모양().

* 照臨(조림): 1. 해나 달이 위에서 내리 비침, 2. 신불()이 세상()을 굽어봄, 3. 군주()가 국토()ㆍ인민()을 통치()함.

* 屋漏(옥루): 「집안에서 가장 깊숙하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일컫는 말.

* 矯激(교격): 마음이 굳세고 과격()함.

 

當此之時, 見可喜則喜, 見可怒則怒, 當哀而哀, 當樂而樂, 由其有愼獨之潛功, 故遇事而發, 無不中節, 斯豈非天下之至和乎? 

이것을 당한 때에(當此之時, 이발시에), 기뻐할 만한 것을 보면(見可喜則) 기뻐하고(喜), 노할 만한 것을 보면(見可怒則) 노하고(怒), 슬픔을 당하면(當哀而) 슬퍼하고(哀), 기쁨을 당하면(當樂而) 기뻐하는 것은(樂), 그(其) 신독의 숨겨진 공부가 있기(有愼獨之潛功) 때문이고(由), 그러므로(故) 일을 만나서(遇事而) 드러나면(發),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無不中節), 이것이(斯) 어찌(豈) 천하의 지극한 화가(天下之至和) 아니겠는가(乎)? 

 

○衆人則不然, 方其未發之時, 謂‘目之所不睹而無所戒愼’, 謂‘耳之所不聞而無所恐懼’, 謂‘隱之不可現而不信天道’, 謂‘微之不可顯而不畏天命’, 思遇一事, 欲作矯激之行, 以欺一世, 思畫一計, 任遂偏倚之情, 以利一身, 當此之時, 其所以爲喜怒哀樂者, 或失之過, 或失之不及, 或失之偏, 或失之有倚. 

○많은 사람이(衆人則) 그렇지 못하니(不然), 바야흐로(方) 그(其) 미발한 때에(未發之時),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서(目之所不睹而) 조심할 것이 없다(無所戒愼)’라고 하고(謂),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고(謂‘耳之所不聞而無所恐懼’),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천도를 믿을 수 없다고 하고(謂‘隱之不可現而不信天道’), 작은 것이 드러나지 않아서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謂‘微之不可顯而不畏天命’), 생각이(思) 한 일을 만나면(遇一事), 과격하게 행동해서(矯激之行, 以) 일세의 사람을 속이려(欺一世) 하고( 欲作), 생각이(思) 한 계책을 그리면(畫一計), 치우친 감정에(偏倚之情) 맡기고 따라(任遂, 以) 자기에게 이익되도록(利一身), 이것을 당한 때에(當此之時, 이발시), 그(其) 희로애락을 만드는 것이(所以爲喜怒哀樂者), 혹(或) 잘못된 것이 지나치고(失之過), 혹(或) 잘못된 것이 미치지 못하고(失之不及), 혹(或) 잘못된 것이 편벽되고(失之偏), 혹(或) 잘못된 것이(失之) 치우침이 있다(有倚).

* 偏倚(편기): 1. 기울어져 있음, 2. 수치()ㆍ위치()ㆍ방향() 따위가 정상적()인 기준()으로부터 어긋남. 또는 그 정도()나 크기. 편차().

 

由是觀之, 致中非愼獨不能也, 致和非愼獨不能也, 中庸之道, 非愼獨不能也. 今以未發之中, 已發之和, 欲爲天下人之通論, 可乎, 不可乎? 

이것을 따라(由是) 보면(觀之), 치중은(致中) 신독이 아니면(非愼獨) 할 수 없고(不能也), 치화는(致和) 신독이 아니면(非愼獨) 할 수 없으니(不能也), 중용의 도는(中庸之道), 신독이 아니면(非愼獨) 할 수 없다(不能也). 지금(今) 미발지중과(以未發之中), 이발지화를(已發之和), 천하사람의(天下人之) 통론으로(通論) 삼는 것이(欲爲), 옳은가(可乎), 옳지 않은가(不可乎)? 

 

 

○致中和之能位育, 何也? 致中和者, 至誠也, 至誠者, 天道也, 至誠之人, 與天合德, 則上可治天, 下可治地. 故南正重司天, 北正黎司地, 及堯之時, 羲伯司天, 和伯司地, 以正曆象, 以建圭臬. 於是百度具擧, 庶績成熙, 山林川澤, 各有官守, 艸木鳥獸, 時養時殺, 此所謂能盡人性, 能盡物性也. 原其所本, 豈非愼獨之誠, 有以致此也乎? 

○치중화가(致中和之) 제자리를 잡고 키울 수 있는 것은(能位育), 어째서인가(何也)? 치중화란(致中和者), 지성이고(至誠也), 지성이란(至誠者), 천도고(天道也), 지성하는 사람이(至誠之人), 하늘과 더불어(與天) 덕에 부합하면(合德, 則) 위로는(上) 하늘을 다스릴 수 있고(可治天), 아래로는(下) 땅을 다스릴 수 있다(可治地). 그러므로(故) 남정 중이(南正重) 하늘을 맡고(司天), 북정 여가(北正黎) 땅을 맡고(司地), 요의 시대에 이르러(及堯之時), 희백이(羲伯) 하늘을 맡고(司天), 화백이(和伯) 땅을 맡아(司地, 以) 역과 상을(曆象) 바로잡고(, 以) (해시계의) 말뚝을 세웠다(建圭臬). 이에(於是) 모든 법도가(百度) 갖춰졌고(具擧), 많은 일이 쌓여(庶績) 성취가 찬란했고(成熙), 산림과 천택에(山林川澤), 각자(各) 관리하는 사람이 있고(有官守), 초목과 조수가(艸木鳥獸), 때맞춰 기르고(時養) 때맞춰 죽여(時殺), 이것이(此) 이른바(所謂) 사람의 성품을 다할 수 있고(能盡人性), 만물의 성품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能盡物性也). 근 근본인 것을(其所本) 찾아보면(原), 어찌(豈) 신독의 성이 아니면(非愼獨之誠), 이것을 지극히 할 수 있었겠는가(有以致此也乎)? 

 

○〈樂記〉云‘動己而天地應焉, 四時和焉, 星辰理焉, 萬民育焉’, 此夸語也. 其謂之大本者, 何也, 先儒謂‘人主一心, 爲萬化之本’, 愼獨之功, 能於未發之時, 立其中正, 以基位育之功, 其非天下之大本乎? 

○악기에서(〈樂記〉) ‘내가 움직여(動己而) 천지가 감응하고(天地應焉), 사시가(四時) 조화를 이루고(和焉), 별이 다스려지고(星辰理焉), 만민이(萬民) 길러진다(育焉)’라고 한 것은(云), 이것은(此) 과장된 말이다(夸語也). 그(其) 큰 근본을 말한 것은(謂之大本者), 어째서인가(何也), 선유가(先儒) ‘임금의(人主) 한 마음이(一心), 만화의 근본이(萬化之本) 된다(爲)’라고 한 것은(謂), 신독의 공부가(愼獨之功), 미발지시에(於未發之時), 그 중정을(其中正) 세울 수 있어서(, 以) 제자리에 서고(基位) (만물이) 길러지는 공은(育之功), 그것이(其) 천하의 큰 근본이(天下之大本) 아니겠는가(乎)?

 

其謂之達道者, 何也? 喜怒哀樂, 發而中節, 則內之處父子昆弟, 外之處君臣朋友, 無往而不行吾之仁, 無適而不行吾之義, 沛然四達, 莫之夭閼, 豈非天下之達道乎? 

그것을(其) 달도라고 말한 것은(謂之達道者), 어째서인가(何也)? 희로애락이(喜怒哀樂), 드러나서(發而) 절도에 맞으면(中節, 則) 안으로(內之) 부자형제에 처해서(處父子昆弟), 밖으로(外之) 군신붕우에 처해서(處君臣朋友), 가서(往而) 내 인을 행하지 못할 것이(不行吾之仁) 없고(無), 가서(適而) 내 의를 행하지 못할 것이(不行吾之義) 없어서(無), 세차게(沛然) 사방에 도달하여(四達), 무엇도(莫之) 막을 수 없으니(夭閼), 어찌(豈) 천하의 달도가 아니겠는가(非天下之達道乎)? 

* 夭閼(요알)→抑制(억제): 억눌러 제지()함.

 

○昔在乾隆甲辰之夏, 亡友曠菴 李德操, 與余論《中庸》大義, 毫分縷析, 靡有遺感, 獨於未發ㆍ已發之說, 常曰此節不可曉, 今三十年矣. 若使曠菴得聞余今日之論, 必犂然相入矣. 九原難作, 何嗟及矣. 

○옛날(昔) 건륭 갑진년 여름에(在乾隆甲辰之夏), 죽은 친구(亡友) 광암 이덕조가(曠菴 李德操), 나와 더불어(與余) 중의 큰 뜻을(《中庸》大義) 논하면서(論), 잘게 쪼개어 분석해도(毫分縷析), 유감이 있지(有遺感) 않았는데(靡), 다만(獨) 미발과 이발의 설에 대해서는(於未發ㆍ已發之說), 늘(常曰) 이 절을(此節) 이해하지 못했고(不可曉), 지금(今) 30년이 지났다(三十年矣). 만약(若) 광암으로 하여금(使曠菴) 나의 오늘 이론을(余今日之論) 듣게 한다면(得聞), 반드시(必) 밝아져(犂然) 받아들였을 것이다(相入矣). 九原難作, 何嗟及矣. 

* 毫分縷析(호분누석): 「털을 나누고 실오라기를 쪼갠다.」는 뜻으로, 썰어서 잘게 나눔, 아주 잘게 나눔.

 

朱子曰: "蓋天命之性, 純粹至善, 而具於人心者, 其體用之全, 本皆如此, 不以聖愚而有加損也. 然靜而不知所以存之, 則天理昧而大本有所不立矣, 動而不知所以節之, 則人欲肆而達道有所不行矣. 

朱子曰: "대개(蓋) 천명의 성은(天命之性), 순수하고(純粹) 지극히 선하여(至善, 而) 사람 마음에(於人心) 갖춰진 것이니(者), 그(其) 체용의(體用之) 완전함이(全), 본래(本) 모두(皆) 이와 같아서(如此), 성인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도(以聖愚而) 더하고 덜 것이 있지 않다(有加損也). 그러나(然) 고요하면서(靜而) 보존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不知所以存之, 則) 천리가 어두워져서(天理昧而) 대본에(大本) 서지 못하는 것이 있고(有所不立矣), 움직이면서(動而) 절제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不知所以節之, 則) 인욕이 방자해져(人欲肆而) 달도에(達道)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有所不行矣).

 

惟君子自其不睹不聞之前, 所以戒謹恐懼者, 愈嚴愈敬, 以至於無一毫之偏倚, 而守之常不失焉, 則爲有以致其中, 而大本之立, 日以益固矣. 

오직(惟) 군자만이(君子) 스스로(自) 그(其) 보이지 않고(不睹) 들리지 않는 것(不聞之) 앞에서(前), 계근공구하는 사람이어서(所以戒謹恐懼者), 더욱 엄격하고(愈嚴) 더욱 공경하여(愈敬, 以) 한 터럭의(一毫之) 치우침이 없어서(偏倚, 而) 늘 지켜서(守之常) 잃지 않음에 이르면(不失焉, 則) 그 중을 지극하게 하여(致其中, 而) 대본이 서는 것이(大本之立), 날로(日以) 더욱(益) 견고해질 수 있다(爲有以固矣).

 

尤於隱微幽獨之際, 而所以謹其善惡之幾者, 愈精愈密, 以至於無一毫之差謬, 而行之每不違焉, 則爲有以致其和, 而達道之行, 日以益廣矣." 【見《或問》】 

더욱이(尤) 은미하고(隱微) 유독한(幽獨之) 즈음에(際, 而) 그 선악의 기미에(其善惡之幾) 삼가는 것이(所以謹者), 더욱 정밀하고(愈精) 더욱 자세하여(愈密, 以) 한 터럭의(一毫之) 오류도 없고(差謬, 而) 행하는 것이(行之) 늘(每) 어기지 않음에 이르면(不違焉, 則) 그 화를 지극히 해서(致其和, 而) 달도를 행하는 것이(達道之行), 날로(日以) 더욱(益) 넓어질 수 있다(爲有以廣矣)." 【見《或問》】 

 

○箴曰 朱子於此, 亦以中和出於愼獨, 特於《章句》無此意思, 故俗儒不能知耳. 今之學者, 表章朱子此說, 以爲指南, 庶不迷矣. 

○箴曰 주자가(朱子) 여기에서(於此), 또한(亦) 중화가(以中和) 신독에서(於愼獨) 나온다고 했는데(出), 다만(特) 장구에서(於《章句》) 이런 생각이 없었고(無此意思), 그러므로(故) 속유가(俗儒) 알 수 없었을 뿐이다(不能知耳). 지금의 학자가(今之學者), 주자의 이 설을(朱子此說) 드러내어(表章), 지남으로 삼으면(以爲指南), 거의(庶)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不迷矣). 

* 表章(표장)→表彰(표창): 남의 공적()이나 선행()을 세상()에 드러내어 밝힘.

 

但天命之性, 雖聖愚同得, 而中和二字, 乃成德之美名, 必用力推致而後, 乃爲吾有. 豈可於不用力之前, 先有中和之德, 釘著人心者乎? 通論聖愚, 則百藤千葛, 棼然以興, 卒無以摞理也. 所服膺者, 惟君子以下. 

단(但) 하늘이 명한 본성이(天命之性), 비록(雖) 성현과 어리석은 사람이(聖愚) 얻은 것이 같더라도(同得, 而) 중과 화 두 글자는(中和二字), 곧(乃) 성덕의(成德之) 아름다운 이름이니(美名), 반드시(必) 힘써서(用力) 미루어 다하고(推致) 나서(而後), 곧(乃) 나에게 있는 것이 된다(爲吾有). 어찌(豈) 힘쓰기 전에(可於不用力之前), 먼저(先) 중화의 덕이(中和之德), 사람 마음에(人心) 못 박혀 드러난 것이(釘著者) 있겠는가(乎)?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을(聖愚) 싸잡아 말한다면(通論, 則) 百藤千葛, 棼然以興, 卒無以摞理也. 所服膺者, 惟君子以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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