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貢曰: “가난하지만(貧而) 아첨하지 않고(無諂), 부유하지만(富而) 교만하지 않으면(無驕), 어떤가요(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曰: “괜찮지만(可也), 가난한데도 즐거워하고(貧而樂), 부유한데도(富而) 예를 좋아하는 것(사람)만(好禮者) 못하다(未若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貢曰: “시에 이르기를(《詩》云), ‘잘라낸 듯하고(如切) 갈아낸 듯하고(如磋), 쪼아낸 듯하고(如琢) 갈아낸 듯하다(如磨).' 아마도(其) 이것을(斯之) 말하는 것인가요(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子曰: “사야(賜也), 비로소(始) 너와 함께(與) 시를 말할 수 있구나(可言《詩》已矣), 지나간 것을(諸往) 일러주니(告而) 올 것을 아는 사람이로구나(知來者)!”
補曰 可也, 許之而未深然之辭也. 切, 割也, 琢, 斲也, 此麤治之工也. 磋磨, 所以爲滑, 其工精也. 無諂無驕, 去惡也, 其工麤. 樂與好禮, 爲善也, 其工精.
補曰 가란(可也), 허락했지만(許之而) 아직 깊지 않은 듯하다는(未深然之) 말이다(辭也). 절은(切), 잘라냄이고(割也), 탁은(琢), 쪼아 냄이고(斲也), 이것은(此) 거칠게(麤) 다듬는(治之) 작업이다(工也). 차와 마는(磋磨), 매끄럽게 만드는(爲滑) 것이니(所以), 그 작업이(其工) 정밀하다(精也). 무첨무교는(無諂無驕), 악을 없앤 것으로(去惡也), 그 작업이(其工) 거칠다(麤). 락과(樂與) 호례는(好禮), 선이 된 것이니(爲善也), 그 작업이(其工) 정밀하다(精).
○朱子曰: “往者, 其所已言. 來者, 其所未言."【《詩ㆍ衛風ㆍ淇奧》之篇】
○朱子曰: “왕이란(往者), 그(其) 이미 말한 것이다(所已言). 래란(來者), 그(其)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所未言)."【《詩ㆍ衛風ㆍ淇奧》之篇】
邢曰: “骨曰切, 象曰磋, 玉曰琢, 石曰磨."
邢曰: “뼈는(骨) 절이라 하고(曰切), 상아는(象) 차라 하고(曰磋), 옥은(玉) 탁이라 하고(曰琢), 돌은(石) 마라 한다(曰磨)."
○駁曰 非也. 此本《爾雅ㆍ釋器》文. 【毛萇亦引之】 然骨不能無磋, 象不能無切. 玉不磨, 雖琢無用, 石不琢, 欲磨不得. 《爾雅》一物一名, 本是謬義. 精麤之義, 始發於朱子, 其見度越千古. 若非精麤之喻, 則此經問答, 泊然無味, 終不可解.
○駁曰 非也. 이것은(此) 본래(本) 이아의 석기(《爾雅ㆍ釋器》)에 있는 글이다(文). 【毛萇亦引之】 그러나(然) 뼈도(骨) 갈지 않을(無磋) 수 없고(不能), 상아도(象) 자르지 않을(ㅌ無切) 수 없다(不能). 옥은(玉) 갈지 않으면(不磨), 비록(雖) 쪼은 것도(琢) 쓸모가 없고(無用), 돌은(石) 쪼아내지 않으면(不琢), 갈려고 해도(欲磨) 할 수 없다(不得). 이아에서(《爾雅》) 한 물체에(一物) 하나의 이름을 붙인 것도(一名), 본래(本) 이것이(是) 잘못된 뜻이다(謬義). 정교한 것과 거친 것의(精麤之) 뜻이(義), 주자에게서(於朱子) 처음 나타났는데(始發), 그(其) 견해의(見) 탁월함이(度越) 천고이다(千古). 만약(若)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의(精麤之) 비유가(喻) 아니었다면(非, 則) 이 경의(此經) 문답이(問答), 담백하여(泊然) 맛이 없고(無味), 끝내(終)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不可解).
孔曰: “往, 告之以貧而樂道. 來, 答之以切磋琢磨."
孔曰: “왕은(往), 빈이락도로(以貧而樂道) 일러준 것이다(告之). 래는(來), 절차탁마로(以切磋琢磨) 답한 것이다(答之)."
○駁曰 非也. 往, 如已過之境. 來, 謂未然之事. 往, 已著者也. 來, 未顯者也. 貧樂富禮, 有跡可見, 道學精麤, 其理至微, 聞此知彼, 非敏不能. 此之謂告往而知來也.
○駁曰 非也. 왕은(往), 이미(已) 지나간 경지와(過之境) 같다(如). 래는(來), 드러나지 않은(未然之) 일을(事) 말한다(謂). 왕은(往), 이미(已) 드러난 것이고(著者也). 래는(來), 아직(未)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顯者也). 빈락부례는(貧樂富禮), 볼 수 있는(可見) 자취가 있고(有跡), 도학의(道學)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은(精麤), 그 이치가(其理) 지극히 미묘해서(至微), 이것을 듣고(聞此) 저것을 아는 것은(知彼), 민첩하지 않으면(非敏) 할 수 없다(不能). 이것을(此之) 고왕이지래라고(告往而知來) 말했다(謂也).
考異 〈坊記〉: “子云, ‘貧而好樂, 富而好禮, 衆而以寧者, 天下其幾矣?’”
考異 〈坊記〉: “선생님이 이르기를(子云), ‘가난한데도(貧而) 악을 좋아하고(好樂), 부유한데도(富而) 예를 좋아하고(好禮), 많은데도(衆而) 편안함으로 하는 사람은(以寧者), 천하에(天下) 거의 가깝다(없다?)(其幾矣)?’”
○《史記ㆍ弟子傳》云: “貧而樂道, 富而好禮."
○《後漢書ㆍ東平憲王傳》: “《論》云, ‘貧而樂道, 富而好禮.'”【純云: “石經, ‘樂’下有‘道’字, 見明 仲和卿《四書備考》ㆍ皇侃《義疏》及我國博士家古本《集解》, 皆同."】
○案 《集解》再引孔註, 皆云貧而樂道, 古本疑有此字. 然只一樂字有深味.
○案 집해에서(《集解》) 공안국의 주를(孔註) 다시 인용한 것이(再引), 모두(皆) 빈이락도라 했고(云貧而樂道), 고본에(古本) 이 글자가(此字) 있었던(有) 듯하다(疑). 그러나(然) 다만(只) 한 글자 락자에(一樂字) 깊은 맛이 있다(有深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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