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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집주 위정(爲政) 2-4]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 지우학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소욕불유구(志于學 不惑 知天命 耳順 從心所欲不踰矩)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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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吾) 열다섯 살에(十有五而) 배움에(于學) 뜻을 두었고(志),

 

* 吾十有五 : '有'가 접속사로 '와, 과, 또'의 뜻으로 쓰였다. '열하고 또 다섯'으로 풀면 '열다섯'이 된다.

 

古者十五而入大學. 心之所之謂之志. 此所謂學, 卽大學之道也.

옛날에(古者) 열 다섯 살이면(十五而) 대학에 들어갔다(入大學). 마음이 가는 것(心之所之) 그것(之)을 지(志)라고 한다(謂). 여기서(此) 이른바(所謂) 학(學)이란, 곧(卽) 대학의(大學之道) 도다(也).

 

志乎此, 則念念在此而爲之不厭矣.

이것에(乎此) 뜻을 두면(志, 則), 생각이 모두(念念) 여기에 있어서(在此而) 그것(之)을 싫어하지 않게(不厭) 된다(爲矣).

 

三十而立, (삼십이립)

서른 살에(三十而) <홀로> 섰고(立),

 

有以自立, 則守之固而無所事志矣.

스스로 설(自立) 수(有以) 있으면(則), 그것(之)을 지킴(守)이 견고하고(固而) 뜻 두기를(志) 일삼을(事) 것(所)이 없다(無矣).

 

四十而不惑, (사십이불혹)

사십에(四十而) 미혹하지 않았고(不惑)

 

於事物之所當然, 皆無所疑, 則知之明而無所事守矣.

사물의(事物之) 당연한 것(所當然)에(於), 모두(皆) 의심하는 것(所疑)이 없다면(無, 則), 앎이(知之) 밝아지고(明而) 지키는 것을(守) 일삼을 것(所事)이 없다(無矣).

 

五十而知天命, (오십이지천명)

오십에(五十而) 천명을 알았고(知天命),

 

天命, 卽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 乃事物所以當然之故也. 知此則知極其精, 而不惑又不足言矣.

천명(天命)은, 곧(卽) 천도가(天道之) 유행하여(流行而) 사물에 부여된(賦於物) 것(者)이니, 바로(乃) 사물(事物)이 마땅히(當) 그러한 것의(所以然之) 까닭이다(故也). 이것을 안다면(知此則) 앎(知)이 그 정밀함(其精)을 지극하게 해서(極, 而) 의혹이 없음(不惑)을 또(又) 말하기(言)에 부족하다(不足矣) / 의혹이 없음은 또 말할 것도 없다.

 

六十而耳順, (육십이이순)

육십에(六十而) 귀가 순해졌고(耳順),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

소리가 들어오면(聲入) <바로> 마음이 통하고(心通), 어긋나고 거스르는 것(所違逆)이 없고(無), 앎이(知之之) 지극해서(至), 생각하지 않아도(不思而) 얻는다(得也).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칠십에(七十而) 마음(心)이 하고자 하는 것(所欲)을 따라도(從), 법도(矩)를 넘지 않았다(不踰).

 

從, 如字.

○ 從, 隨也. 矩, 法度之器, 所以爲方者也. 隨其心之所欲, 而自不過於法度, 安而行之, 不勉而中也.

종(從)은, 따름이다(隨也). 구(矩)는, 법도의 기구(法度之器)고, 모남을 다스리는(爲方) 도구다(所以者也). 그(其) 마음이(心之) 하고자 하는 것(所欲)을 따르더라도(隨, 而) 자연스럽게(自) 법도를(於法度) 넘지 않고(不過), 편안하게(安而) 그것을 행하고(行之), 힘쓰지 않아도(不勉而) 맞음이다(中也).

 

○ 程子曰: “孔子生而知之也, 言亦由學而至, 所以勉進後人也. 立, 能自立於斯道也.

정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태어나면서(生而) 그것을 알았지만(知之也), 또한(亦) 배움으로 말미암아(由學而) 이르렀다(至)고 말한(言) 것은, 후인을(後人) 나아가게(進) 권면하려는(勉) 까닭이다(所以也). 립(立)은, 이 도에(於斯道) 스스로 설(自立) 수 있음이다(能也).

 

不惑, 則無所疑矣. 知天命, 窮理盡性也. 耳順, 所聞皆通也. 從心所欲, 不踰矩, 則不勉而中矣.”

불혹(不惑, 則)하면, 의심하는 것(所疑)이 없음이다(無矣). 지천명(知天命)은, 이치를 궁구하고(窮理) 본성을 다함(盡性)이다(也). 이순(耳順)은, 들은 것(所聞)이 모두(皆) 통함이다(通也). 마음이 하려는 것(心所欲)을 따르면서(從), 법도(矩)를 넘지 않으면(不踰, 則), 힘쓰지 않아도(不勉而) 맞는다(中矣).

 

又曰: “孔子自言其進德之序如此者, 聖人未必然, 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 그(其) 덕에 나아감의 순서(進德之序)가 이와 같다고(如此) 스스로 말한(自言) 것(者)은, 성인(聖人)이 반드시(必) 그렇지는(然) 않지만(未), 다만(但) 배우는 사람을 위해(爲學者) 법을 세우고(立法), 그들로 하여금(使之) 과정을 채운(盈科) 뒤에(而後) 나아가고(進), 문장을 이룬(成章) 뒤에(而後) 통달하도록(達) 한 것일 뿐이다(使-耳).”

 

胡氏曰: “聖人之敎亦多術, 然其要使人不失其本心而已. 

호씨가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이(聖人之敎) 또한(亦) 방법이 많지만(多術), 그러나(然) 그 요점(其要)은 사람이(人) 그 본심(其本心) 잃지 않게(不失) 하려는 것일 뿐이다(使-而已). 

 

欲得此心者, 惟志乎聖人所示之學, 循其序而進焉. 至於一疵不存, 萬理明盡之後, 則其日用之間, 

이 마음(此心)을 얻기(得)를 바라는(欲) 사람(者)은, 오직(惟) 성인(聖人) 보여준(所示之) 배움(學)에(乎) 뜻을 두고(志),  그 차례를 따라서(循其序而) 거기에 나아간다(進焉). 하나의 허물도(一疵) 있지 않고(不存), 만 가지 이치(萬理)의 밝아짐이 다함에(明盡之) 이른(至) 뒤라면(後, 則) 그(其) 일용지간(日用之間)에, 

 

本心瑩然, 隨所意欲, 莫非至理. 蓋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矣.”

본심(本心)의 환해서(瑩然), 뜻이 원하는 것(所意欲)을 따르더라도(隨), 지극한 이치(至理) 아닌(非) 것이 없다(莫). 대개(蓋) 마음(心)이 곧(卽) 체이고(體), 욕망(欲)이 곧(卽) 용이며(用), 체(體)는 곧(卽) 도(道)고, 용(用)은 곧(卽) 의(義)라서, 소리가(聲) 법칙이 되고(爲律而) 몸(身)이 법도가 된다(爲度矣).

 

又曰: “聖人言此, 一以示學者當優游宿泳, 不可躐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또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이것을 말해서(言此), 하나는(一以) 학자가(學者) 마땅히(當) 푹 잠겨 헤엄치듯 하며(優游宿泳), 등급을 뛰어넘고(躐等而) 나아가서(進)는 안됨(不可)을 보이고(示); 돌은(二以) 학자(學者)가 마땅히(當) 날로 나아가고 달로 전진하며(日就月將), 길 중간에서(半途而) 그만두면(廢) 안됨(不可)을 보였다(示-也).

 

愚謂聖人生知安行, 固無積累之漸, 然其心未嘗自謂已至此也. 

내가 생각건대(愚謂), 성인이(聖人) 나면서부터 알고(生知) 편안하게 행하므로(安行), 진실로(固) 포개어 쌓아 나감(積累之漸)이 없었고(無), 그러나(然) 그 마음이(其心)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고(已至此) 일찍이(嘗) 스스로 말함(自謂)이 없다(未-也). 

 

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이는(是) 그(其) 평소 생활의 가운데(日用之間), 반드시(必) 홀로(獨) 그 나아감(其進)을 깨닫고(覺而) 남들이(人) 앎에(知) 이르지 못함(不及)이 있는(有) 것이다(者).  

 

故因其近似以自名, 欲學者以是爲則而自勉, 非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也. 後凡言謙辭之屬, 意皆放此.

그러므로(故) 그 가까운 것으로(其近似以) 인하여(因) 스스로 이름 붙이고(自名), 배우는 사람(學者)이 이것으로(以是) 법칙을 삼아서(爲則而) 스스로 힘쓰게(自勉) 하려 함이니(欲), 마음에(心) 실제로(實) 자기를(自) 성인이라고(聖而) 姑 이(是) 핑계를(退託) 댄(爲) 것이 아니다(非-也). 뒤에(後) 무릇(凡) 겸사 따위를(謙辭之屬) 말한(言) 것이, 뜻(意)이 모두(皆) 이와 같다(放此).


 

이 장에서 공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눠서 말했다. 이 문장에 칠십이라는 나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자가 73세로 죽기 전에 한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나이 들어 인생을 회고한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스럽게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한 말에는 사건의 나열이 없다. 추상적인 삶의 느낌이나 경지를 조촐하게 고백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오히려 공자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공자의 삶은 개인이 느끼는 감정에서 출발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보편의 세계로 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십오 세에는 자신의 불우한 처치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고, 삼십 세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사십 세에는 세상의 유혹을 모두 막아내서 미혹에 빠지지 않았다.

사십까지의 삶이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이었다면, 오십부터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내 인격을 완성하는 시기다. 오십 세에 천명을 알아서 인간 세상의 보편적 원리를 깨우쳤고, 육십 세에는 외부 사건이 나를 아무리 흔들어도 감정의 동요가 없고, 칠십 세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 경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공자의 말은 칸트의 도덕철학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칸트는 '최고선은 의지와 도덕률이 일치하는 경지이며, 이성적이고 유한한 인간은 살아서는 이 경지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이 노력을 위해 필요한 것이 영혼불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자는 의지와 도덕률을 일치시키는 것이 살아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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