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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집주 학이(學而) 1-15]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으면 /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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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貢曰: “貧而無諂(빈이무첨), 富而無驕, 何如(부이무교 하여)?”

자공이 말하기를: 가난해도(貧而) 아첨함이 없고(無諂), 부유해도(富而) 교만함이 없으면(無驕), 어떠한가요(何如)?

 

* 이 장은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통해서 호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4장, 15장과의 연속성을 알 수 있다.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면서도, 이재에 밝은 자신의 모순된 상황에 대한 반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可'였다. 이것은 긍정의 대답이 아니다. 부정의 온건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해준다. (논어한글역주, 김용옥)

 

樂, 音洛. 好, 去聲. ○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첨(諂)은, 낮추고 굽힘이다(卑屈也). 교(驕)는, 자랑하고(矜) 으스댐이다(肆也). 보통사람이(常人) 빈부의(貧富之) 가운데(中)에(於) 빠지면(溺而), 자기를 지키는(自守) 방법(所以)을 알지 못하고(不知), 그러므로(故) 반드시(必) 두 가지의(二者之) 병(病)이 있다(有). 아첨함이 없고(無諂) 교만함이 없으면(無驕則) 자기를 지킬 줄(自守) 알지만(知矣而), 아직(未) 빈부의(貧富之) 바깥(外)으로(乎) 넘어설(超) 수 있는 것은 아니다(未能也).

 

子曰: “可也(가야). 未若貧而樂(미약빈이락), 富而好禮者也(부이호례자야).”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괜찮다(可也). 가난하지만(貧而) 즐기고(樂), 부유하지만(富而) 예를 좋아하는(好禮) 것(者)만 못하다(未若也).

 

* '무첨無諂'이나 '무교無驕'는 모두 '無'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는 부정적 가치이다. 부정적 가치를 따르는 소극적 대처로 군자다운 삶을 살 수는 없다. 공자는 빈에 대한 락을, 부에 대한 호례를 새로운 가치로 제시했다.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而忘其貧, 

무릇(凡) 可를 말한(曰可) 것은(者), 겨우 괜찮지만(僅可而) 미진한 것(所未盡)이 있다는(有之) 말이다(辭也). 즐거우면(樂則) 마음이 넓어지고(心廣) 몸이 펴져서(體胖而) 그 가난함(其貧)을 잊고(忘),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예를 좋아하면(好禮則) 선에 처하기를(處善) 편안하게 여기고(安), 이치 따르기를(循理) 즐겨서(樂), 또한(亦) 스스로(自) 그 부유함(其富)을 알지(知) 못한다(不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자공(子貢)이 재화(貨)를 불린(殖) 것이, 대체로(蓋) 처음에 가난하고(先貧) 나중에 부유했므로(後富而) 일찍이(嘗) 자기를 지키는 것에(於自守) 힘쓴(用力) 사람이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그러므로(故) 이것으로써(以此) 질문을 했다(爲問). 그런데(而) 선생님이(夫子) 이와 같이(如此) 답했으니(答之), 대체로(蓋) 그(其) 자기가 잘하는 것(所已能)을 인정하고(許而) 그(其) 이르지 못한 것(所未至)을 힘쓰게 했다(勉也).

 

子貢曰: “『詩』云(시운 ): ‘如切如磋(여절여차), 如琢如磨(여탁여마).’ 其斯之謂與(기사지위여)?”   

자공이 말하기를: 시(詩)에 이르기를(云): 자른 듯하고(如切) 미는 듯하고(如磋), 쪼는 듯하고(如琢) 가는 듯하다(如磨) 한 것이, 아마도(其) 이것을(斯之) 말한 것인가요(謂與)?

 

磋, 七多反. 與, 平聲. ○ 『詩』衛風「淇澳」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시(詩) 위풍(衛風) 기욱편(淇澳之篇)으로, 골각을 다듬는(治骨角) 사람(者)은, 먼저(旣) 그것을 자르고(切之而) 다시(復) 그것을 갈며(磋之); 옥석을 다듬는(治玉石) 사람(者)은, 먼저(旣) 그것을 쪼고(琢之而) 다시(復) 그것을 가니(磨), 그것을 다듬은(治之) 것이 이미(已) 정밀하지만(精而) 그 정밀함(其精)을 더욱(益) 구한다(求也)는 말이다(言).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詩以明之.

자공(子貢)이 스스로(自) 무첨무교를(以無諂無驕) 지극하다고 여겼다가(爲至矣), 부자의 말(夫子之言)을 듣고(聞), 또(又) 의리의 무궁하고(義理之無窮), 비록(雖) 그것에서(焉) 얻음이 있더라도(有得而) 급히(遽) 스스로 만족할(自足) 수 없음을(未可) 알았고(知也), 그러므로(故) 이 시를 인용함(引是詩)으로써(以) 그것을 밝혔다(明之).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사야시가여언시이의)! 告諸往而知來者(고저왕이지래자).”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는(賜也), 비로소(始) 함께(與) 시를 말할(言詩) 수(可) 있겠구나(已矣)! <그에게> 지나간 것에 대해(諸往) 일러주니(而) 올 것(來)을 아는(知) 사람이구나(者).

 

* '고저왕이지래자告諸往而知來者'는 문자 그대로 과거를 알려주니 미래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 한 귀퉁이를 들어서 알려주니 나머지를 모두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주희는 '왕往'자를 말로 표현한 것으로, '래來'자를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으로 풀었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지나간(往) 것(者)은, 그(其) 이미 말한 바(所已言) 것이다(者). 올 것(來者)은, 그(其) 말하지 않은 바(所未言) 것이다(者).

 

○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내가 생각건대(愚按): 이 장(此章)의 문답(問答)은, 그(其) 얕고 깊음(淺深)과 높고 낮음(高下)이, 진실로(固) 변설(辨說)을 기다리지 않아도(不待而) 명백하다(明矣). 그러나(然) 자르지 않으면(不切則) 가는 것에(磋) 베풀 것(所施)이 없고(無), 쪼지 않으면(不琢則) 다듬는 것에(磨) 베풀 것(所措)이 없다(無).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 而不察切己之實病也.

그러므로(故) 배우는 사람(學者)은 비록(雖) 작은 성취에(於小成) 안주할 수 없고(不可安而) 도의 극치(道之極致)에 나아감(造)을 구하지 않을 수 없고(不求); 또(亦) 허원한 데에(於虛遠) 치달아서(騖而) 절실한(切) 자기의 실제 병통(己之實病)을 살피지 않는(不察) 것은 안된다(不可也).

 

* 造(조): 짓다, 저술하다, 세우다 이룩하다, 시작하다, 만나다, 다다르다, 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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