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不琢(옥불탁), 不成器(불성기); 人不學(인불학), 不知道(부지도).
옥이(玉) 쪼아 지지 않으면(不琢), 그릇을(器) 이루지 못하고(不成); 사람이(人) 배우지 않으면(不學), 도(道)를 알지 못한다(不知).
是故古之王者建國君民(시고고지왕자건국군민), 敎學爲先(교학위선).
그러므로(是故) 옛날의(古之) 왕도를 실천한 사람은(王者) 나라를 세우고(建國) 백성에게(民) 임금이 되면(君), 가르침과(敎) 배움이(學) 우선이 되었다(爲先).
《兌命》曰: 念終始典于學. 其此之謂乎!
열명에 이르기를(兌命曰): 처음과 끝(終始)을 생각하여(念) 배우기에(于學) 힘써야 한다(典). 아마도(其) 이것을(此之) 말한 것이다(謂乎)!
雖有嘉肴(수유가효), 弗食(불식), 不知其旨也(부지기지야); 雖有至道(수유지도), 弗學(불학), 不知其善也(부지기선야).
비록(雖) 맛있는 안주가(嘉肴) 있더라도(有), 먹지 않으면(弗食), 그 맛을(其旨) 알지 못하고(不知也); 비록(雖) 지극한 도가(至道) 있더라도(有), 배우지 않으면(弗學), 그 좋음을(其善) 알지 못한다(不知也).
故學然後知不足(고학연후지부족), 敎然後知困(교연후지곤).
그러므로(故) 배우고(學) 나서야(然後) 부족함을(不足) 알고(知), 가르치고(敎) 나서야(然後) 난처함을 안다(知困).
知不足(지부족), 然後能自反也(연후능자반); 知困(지곤), 然後能自強也(연후능자강야), 故曰: 敎學相長也(교학상장야).
부족함을 알고(知不足), 나서야(然後) 자기를(自) 돌아볼 수 있고(能反也); 곤란함을 알고(知困), 나서야(然後) 자기를(自) 강하게 할 수 있고(能強也), 그러므로 말하기를(故曰): 가르침과(敎) 배움은(學) 서로(相) 키워준다(長也).
《兌命》曰: (學)[敎]學半(교학반). 其此之謂乎(기차지위호)!
열명에 말하기를: 가르침은((學)[敎]) 배움이(學) 반이니(半). 아마(其) 이것을(此之) 말하는 것인가(謂乎)!
'화민성속化民成俗'과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두 마디를 제시한 것만으로도 <학기>는 자기 할 일을 다했다. 학기의 주제가 '배움'이지만 그 배움은 '가르침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격조 높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 <학기> 저자의 개방적이고 비권위적인 생각을 알 수 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은 가르칠 수 없고, 가르쳐보지 않은 사람은 그 배움을 심화시킬 방법을 알지 못한다.
'건국군민建國君民'과 '교학위선敎學爲先'이라고 말한 것은 '학기'가 건국의 때, 즉 새로운 문명의 출발 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건국을 하려면, 즉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려면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선결문제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교육을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작용으로 봤다. 공자는 '인에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했고, '유교무류'를 말했다. 공자가 말한 비권위적이고, 보편적이고, 류가 없는 관계가 바로 대학이 말하는 '친민'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에, 피지배자 서로 간에 가르침과 배움의 소통의 있어야 서로가 친밀해지고 국론이 분열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이 주소에는 '학학반學學半'으로 되어 있고, 상서에는 '교학반敎學半'으로 나온다. 보통은 주소의 해석을 따라서 '가르침은 배움의 반이다'라고 하지만 우리식으로 풀면 '가르친다는 것은 그 반이 배우는 것이다'라고 해야 뜻이 명확하다. (대학학기 한글역주,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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