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반기
주희의 대학장구에 가장 강력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명나라의 사상가 왕양명이었다. 주희의 학문은 명대에 와서는 이미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했고, 영락대제가 간행한 사서집주에서 '대학'과 '중용'의 판본을 확정하면서 오경대전에 포함된 '예기대전'에서 대학과 중용 편을 삭제해버릴 정도였다. 따라서 왕양명이 사서집주의 대학을 부정하고 예기 속의 대학을 들고 나온 것은 큰 충격이었다. 예기의 대학을 '고본대학'이라고 부른 것도 왕양명이 만든 신조어였다.
주희의 한계
주희의 '치지격물'에서 핵심은 '격'의 대상이 되는 '물物'을 '리理'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마광이 격물의 물을 도덕적 타락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한어의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정이천이 '물物'을 '리理'의 주체로 파악하고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존중과 함께 그 세계의 발전적 이법을 중시하는 진취적 태도에서 기인했다.
주희는 정이천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격물의 물은 객관적 이법의 담지자로서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물리'다.'명덕'은 선천적인 내면적 덕성의 가능태지만 그것은 격물을 거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매우 주지적이고 객관주의적이고, 진취적이다. 하지만, 이런 진취적 입장은 현실에서 실현될 방법이 없었다. 물리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자연과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희의 '물物'에 대한 관심이 자연과학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주희는 광범위한 인간 세상의 사태(인간의 행동, 사상, 마음까지 '物'로 보는 주희의 관점)에 대해서 어떤 객관적, 사회과학적 법칙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할 지식계급이 형성되지 않았고, 주희의 방법론은 결국 경학에 테둘리에 머물고 말았다.
왕양명의 지행합일
왕양명은 격물의 물이 '물리物理'가 된다면 '심心'과 '물物'이 격절되고 인간주체에서 떨어져 나가서 아무 의미가 없는 물이 된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물리는 심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희의 '인심도심' 구분과 달리 심의 주체적 통일을 주장했고, 강력한 지행합일의 변증법을 제시했다.
주희의 격물이 결국 경전 공부로 돌아간다면, 경전의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내 마음의 도덕적 자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리物理'는 '심리心理'가 되고 만다. 따라서 '격물치지'에서 주희가 '격물'을 강조한 것에 비해서 왕양명은 '치지'의 근원성을 강조했다. '치지'는 '격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이미 있는 선험적 능력인 '양지'의 발현이라고 했다. 주희가 '치지'를 '후천적 지식을 극대화한다'라고 해석한 반면 왕양명은 '선험적 명덕인 양지를 발양시킨다'라고 해석한다. 양지는 심의 본체이면서 타물의 힘을 빌리지 않으므로 격물이란 치지에 부속하는 사태에 불과하다.
왕양명의 '격물格物' 해석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희가 '이른다至'라고 해석한데 반해서 양명은 '바르게 한다正'라고 해석한다. 사마광이 '격물'을 소극적인 한어로 해석하고 왕양명은 적극적인 발현으로 해석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물을 도덕적 범주에 묶어 놓았다는 점에서 양자가 비슷하다.
'치지'가 '치양지'가 되면 그 내용은 '정심성의' 차원으로 변하게 된다. 때문에 왕양명은 '정심성의'를 보다 본질적인 대학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그에게 '지'와 '행'은 격렬한 삶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그래서 '함'과 '앎'은 모두 중요하지만 '함'이라는 실천을 전제하지 않는 학문의 무의미했다.
하지만, 왕양명의 대학 해석은 주희에 비해 정밀하지 못하다. 그가 '고본'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경학적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격格'을 '정正'이라고 해석한 것도 주희가 '지至'라고 해석한 것보다 더 근거가 없는 임의적 해석이다. 양명학은 본래 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이고, 실천이고, 일종의 대중혁명과 같은 것이다. 왕양명의 사상은 명나라 사회의 계층구조의 변화 속에서 태동한 참신한 사상운동이다. 그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사대부 계급의 전유물이라는 의식을 깨고 농, 공, 상의 모든 계층으로 확산시켰다. (대학학기 한글역주,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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