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리달마/무문관(無門關 선어록 읽는 법)

[무문관(無門關) 제 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 세존께서 꽃을 들다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12. 28.
반응형

世尊昔在靈山會上(세존석재영산회상), 拈花示衆(염화시중).

세존이(世尊) 옛날에(昔) 영산의(靈山) 모임에서(在會上), 꽃을 들어(拈花) 무리에게 보였다(示衆).

 

'在'는 원래 '~으로 있다'라는 동사인데, 나중에 '~에서'라는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되었다. '會上'의 '上'은 명사 뒤에 붙어서 장소(주변, 가운데)를 나타내는 접미사다. 

 

是時皆默然(시시중개묵연). 惟迦葉尊者(유가섭존자), 破顏微笑(파안미소).

이때에(是時) 무리가(衆) 모두(皆) 입을 다물었다(默然). 오직(惟) 가섭존자 만이(迦葉尊者), 빙그레(破顏) 미소 지었다(微笑).

 

世尊云(세존운), 吾有正法眼藏(오유정법안장), 涅槃妙心(열반묘심), 實相無相(실상무상), 微妙法門(미묘법문), 不立文字(불립문자), 教外別傳(교외별전), 付囑摩訶迦葉(부촉마하가섭).

세존이(世尊) 말하기를(云), 나에게(吾)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미묘한(微妙) 법문이(法門) 있으니(有), 문자에(文字) 의지하지 않고(不立), 가르침 외에(教外) 따로 전해서(別傳), 마하가섭에게(摩訶迦葉) 부촉한다(付囑).

 

吾有正法眼藏: 이때의 '有'는 '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 있다'는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다. '眼藏'은 '청정한 법안에 일체를 품고 있다'는 뜻으로 '藏'은 일종의 접미사 역할을 한다. 

'涅槃妙心'은 '열반의 오묘한 마음'이다. '涅槃'은 소승불교에서는 '寂滅'로 대승불교에서는 '不生不滅'로 번역되었다. 

 

無門曰: 黃面瞿曇(황면고담), 傍若無人(방약무인), 壓良爲賤(압량위천),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

무문이 말하기를(無門曰): 황금 얼굴을 가진(黃面) 세존(瞿曇, 사라드바트-석가족)이, 곁에(傍) 사람이 없는(無人) 것처럼(若), 양민을 억눌러(壓良) 종으로 삼고(爲賤), 양머리를(羊頭) 걸어 두고(懸) 개고기를 팔았다(賣狗肉).

 

將謂多少奇特(장위다소기특), 只如當時大眾都笑(지여당시대중도소), 正法眼藏作麼生傳(정법안장작마생전).

장차(將) 어느 정도(多少) 별나고 특이한(奇特) 것을 말하는가(謂) 했는데, 다만(只) 만약(如) 당시의(當時) 무리가(大眾) 모두(都) 웃었다면(笑), 정법안장이(正法眼藏) 어떻게(作麼生) 전해졌을까(傳).

 

'多少'는 '많은'의 뜻으로 '少'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첨자다. '都'는 '京都'라는 명사에서 나온 말로 '전부'라는 뜻이다. '作麼生'은 '如何'라는 의문사의 구어체다. 

 

設使迦葉不笑(설사가섭불소), 正法眼藏又作麼生傳(정법안정우작마생전).

만일(設使) 가섭이(迦葉) 웃지 않았다면(不笑), 정법안장이(正法眼藏) 또(又) 어떻게(作麼生) 전해졌을까(傳).

 

'設使'는 두 글자로 '만일 ~라면'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가정의 접속사다. 

 

若道正法眼藏有傳授(약도정법안정유전수), 黃面老子(황면노자), 誑謼閭閻(광호여염), 若道無傳授(약도무전수), 為甚麼獨許迦葉(위심마독허가섭).

만약(若) 道정법안장에(正法眼藏) 전수되는 것이(傳授) 있다면(有), 황금 얼굴의(黃面) 영감이(老子, 세존), 시골 사람을(閭閻) 속여 부른 것이고(誑謼), 만약(若道) 전수되는 것이(傳授) 없다면(無), 어째서(為甚麼) 오직(獨) 가섭에게만(迦葉) 허락했는가(許).

 

'黃面老子'는 '黃面瞿曇'과 같은 말이다. '閭閻'은 '시골 마을 어귀의 문'이란 뜻에서 변해서 '시골 사람, 서민'을 뜻한다. 

 

【頌曰】拈起花來(염기화래), 尾巴已露(미파이로). 迦葉破顏(가섭파안), 人天罔措(인천망조).  

꽃을(花) 들었을 때(拈起來),

꼬리가(尾巴) 이미(已) 드러났네(露).

가섭이(迦葉) 빙그레 웃으니(破顏),

사람과 하늘이(人天) 어쩔 줄 모른다(罔措).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