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子曰: “甚哉(심의), 孝之大也(효지대야)!”
증자가 말하기를(曾子曰): “매우 대단하구나(甚哉), 효의(孝之) 위대함이여(大也)!”
子曰: “夫孝(부효), 天之經也(천지경야), 地之誼也(지지의야), 民之行也(민지행야). 天地之經(천지지경), 而民是則之(이민시칙지).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무릇 효란(夫孝), 하늘의(天之) 벼리요(經也, 뼈대/근본), 땅의(地之) 마땅함이니(誼也), 백성이(民之) 행할 것이다(行也). 하늘과 땅의(天地之) 벼리가 되고(經, 而) 백성이(民) 바로(是) 그것을 본받는다(則之).
則天之明(칙천지명), 因地之利(인지지리), 以訓天下(이훈천하). 是以其敎弗肅而成(시이기교불숙이성), 其政不嚴而治(기정불엄이치).
하늘의(天之) 밝음을(明) 본받고(則), 땅의(地之) 이로움을(利) 따라서(因), 그것으로(以) 천하를(天下) 가르친다(訓). 이 때문에(是以) 그 가르침이(其敎) 엄숙하지 않아도(弗肅而) 이루어지고(成), 그 정치가(其政) 엄격하지 않아도(不嚴而) 다스려진다(治).
先王見敎之可以化民也(선왕견교지가이화민야). 是故先之以博愛(시고선지이박애), 而民莫遺其親(이민막유기친); 陳之以德誼(진지이덕의), 而民興行(이민흥행).
선왕은(先王) 가르침이(敎之) 백성을(民) 교화시킬(化) 수 있음을(可以) 알았다(見也). 그러므로(是故) 넓은 사라으로(以博愛) 그들에(之) 앞서 나가면(先, 而) 백성이(民) 그 부모를(其親) 버리는(遺) 사람이 없고(莫); 덕의 마땅함으로(以德誼) 그들에게(之) 말하면(陳, 而) 백성이(民) 행함을(行) 흥기했다(興).
先之以敬讓(선지이경양), 而民弗爭(이민부쟁); 導之以禮樂(도지이예악), 而民和睦(이민화목); 示之以好惡(시지이호악), 而民知禁(이민지금).
공경함과 사양함을(以敬讓) 그들에게(之) 앞서서 하면(先, 而) 백성이(民) 다투지 않고(弗爭); 예악으로(以禮樂) 그들을 이끌면(導之, 而) 백성이(民) 화목하고(和睦);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以好惡) 그들에게 보여주면(示之, 而) 백성이(民) 하지 말아야 할 것을(禁) 알았다(知).
『詩』云: ‘赫赫師尹, 民具爾瞻.’”
시(詩)에 이르기를(云): ‘빛나고 빛나는(赫赫) 태사(師) 윤이여(尹), 백성이(民) 모두(具) 너를(爾) 보고 있다(瞻).’”
‘삼재장’은 매우 이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효를 우주론적 차원(cosmological dimension)으로 승화시켜 ‘인(仁)’과도 같은 인간 세상의 최고 덕목으로서 논구했다. ‘삼재(三才)’라는 말은 천(天)ㆍ지(地)ㆍ인(人)이라는 우주구성의 보편적 원리개념이며, 『주역』의 「설괘」, 「계사(繫辭)」하에서 유래하였다.
‘불숙이성(弗肅而成)’, ‘불엄이치(不嚴而治)’는 엄숙주의와 엄형주의 배제다. 유교적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하면서 도가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저절로 이루어지고, 저절로 다스려지도록’ 만드는 것이 도덕주의의 궁극적 이상인 것이다.
가장 비근한 인간의 덕목으로서 자연스러운 질서를 사회에 안착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스스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도덕의 이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유가사상은 매우 세련된 것이며, 오늘날의 현대사회에도 물론 적용 가능하다. (효경한글역주,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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