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맹후배/고문효경(古文孝經)

[고문효경(古文孝經) 제 10장] 사람의 행위는 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성치장(聖治章) / 성인지교 불숙이성 기정불엄이치(聖人之敎, 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12. 25.
반응형

曾子曰: “敢問(감문)聖人之德(성인지덕)亡以加於孝乎(망이가어효호)?”

증자가 말하기를: “감히(敢), 성인의(聖人之) 덕이(德), 그것으로(以) 효에(於孝) 더할 것이(加) 없는지(乎) 묻습니다(問).

 

子曰: “天地之性(천지지성)人爲貴人之行莫大於孝孝莫大於嚴父嚴父莫大於配天則周公其人也.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天地之) 생명(性) 중에서, 사람(人) 귀하게 된다(爲貴). 사람의(人之) 행위(行) 중에서, 효보다(於孝) 더 큰(大) 것이 없다(莫). 효는(孝) 아버지를 존엄하게 여김보다(於嚴父) 더 큰(大) 것이 없고(莫), 아버지를 존엄하게 여김은(嚴父) 하늘에 짝지어 <제사 지내는> 것보다(於配天) 더 큰(大) 것이 없으며(則) 주공이(周公) 그런(其) 사람이다(人也).

 

昔者(석자)周公郊祀后稷以配天(주공교사후직이배천),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종사문왕어명당이배상제). 是以四海之内(시이사해지내), 各以其職來祭(각이기직래제). 

옛날에(昔者), 주공이(周公) 후직을(后稷) 하늘에(天) 짝지어서(配) 교제사를 지냈고(郊祀), 명당에서(於明堂) 문왕으로(文王以) 상제에게(上帝) 짝지어(配) 종묘 제사를 지냈다(宗祀). 이 때문에(是以) 사해의(四海之) 안이(内), 저마다(各) 자기 예물로(以其職) 와서(來) 제사 지냈다(祭)

 

郊祀后稷以配天: '후직后稷'은 농경의 신이자 주나라의 시조다. '郊祀'는 교외 들판에서 지내는 제사로 주공이 원구에서 하늘과 동등한 존재로 제사 지냈다고 한다. 

宗祀文王於明堂以配上帝: '宗祀'는 자기 조상의 본원에게 지내는 제사로 '상제上帝'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제사 지냈다는 말이다. '명당明堂'은 흙을 높게 돋아 그 위에 지은 전각으로 오실이 있고 사방에 문이 있는 궁실이다. 

 

夫聖人之德(부성인지덕)又何以加於孝乎(우하이가어효호)?

무릇(夫) 성인의(聖人之) 덕이(德), 또(又) 무엇으로(何以) 효에(於孝) 더할(加) 것이 있는가(乎)?

 

是故親生毓之(시고친생육지), 以養父母曰嚴(이양부모왈엄). 聖人因嚴以敎敬(성인인엄이교경), 因親以敎愛(인친이교애). 

그러므로(是故) 부모가(親) 낳아서(生) 그를 기르고(毓之, 자식), 그것으로(以) 부모를(父母) 봉양하는(養) 것을 존엄하게 여김이라(嚴) 말한다(曰). 성인이(聖人) 존엄함을 따라서(因嚴以) 공경을 가르치고(敎敬), 친애함을 따라서(因親以) 사랑을 가르친다(敎愛)

 

聖人之敎(성인지교)不肅而成(불숙이성)其政不嚴而治(기정불엄이치)其所因者(기소인자)本也(본야).”

성인의(聖人之) 가르침이(敎), 엄숙하지 않지만(不肅而) 이루어지고(成), 그(其) 정치가(政) 엄격하지 않아도(不嚴而) 다스려진다(治). 그(其) 말미암은(因) 것이(所者), 근본이다(本也).”

 

이 장에서 ‘효치(孝治)’라는 개념과 더불어 ‘성치(聖治)’라는 개념이 나왔다. 이 장에 주공(周公)이 등장하기 때문에 유교의 종파적, 제식적 맥락에서 복잡한 해석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훌륭한 정치를 행한 하나의 효(孝)의 본보기일 뿐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장」에서 말한 아버지의 중요성이다. 여기 ‘아버지’라는 것은 라캉의 말대로, 권위를 대변하는 하나의 이름(nomina)이며 상징체(symbol)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존엄하게 한다는 것(‘엄부嚴父’: ‘엄’이 타동사, ‘부’가 그 목적어)이 곧 배천(配天: 하늘에 배향된다. 하늘과 동등한 존재로서 짝지어 모셔진다)이라는 사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고한 존재가 천자(天子)나 왕(王)이나 지상의 최고의 통치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천자에게도 아버지가 있기에 천자는 ‘천자(天子)’일 수 있는 것이다. 주공이 위대한 것은 바로 아버지와 사직의 신을 잘 제사 지냈기 때문이다.

 

후직을 배향할 때는 ‘배천(配天)’이라 했고 ‘교사(郊祀)’라고 했다. 문왕을 배향할 때는 ‘배상제(配上帝)’라 했고 ‘종사(宗祀)’라 했다. 우리가 ‘종묘사직’이라 할 때 문왕은 종묘라는 상징체에 해당하고, 후직은 사직이라는 상징체에 해당한다. ‘배천’의 ‘천(天)’ 땅에 배(配)하는 존재로서 추상화되어 있고, ‘배상제(配上帝)’의 ‘상제(上帝)’는 모든 조상신을 총괄하는 지고의 존재로서 인격화되어 있다.

 

여기 맥락을 잘 살펴보면 『효경』의 일관된 주제가 드러나 있다. 그것은 효의 두 측면, 애(愛)와 경(敬)의 재천명이다. 애는 친(親)과 관련되어 있고 경은 엄(嚴)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엄부(嚴父)와 배천(配天)의 구체적 이미지와 궁극적 의미를 한 인간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그 자신이 그 기름의 애경을 인식하여 다시 부모를 봉양하는 그 역사적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유한한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로 인하여 단절되지만, 그 단절의 연접성ㆍ연속성은 효(孝)로써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효를 통한 성스러운 다스림[聖治]의 궁극적 소이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효경』을 관통하고 있는 ‘성인지교, 불숙이성(聖人之敎 不肅而成)’, ‘성인지정, 불엄이치(聖人之政, 不嚴而治)’라는 말이다. 성치에는 교(敎)와 정(政)의 두 측면이 있으며, 교는 ‘불숙이성(不肅而成)’하고, 정은 ‘불엄이치(不嚴而治)’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의 결어는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其所因者, 本也. ‘성인의 다스림이 의거한 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정치는 사회적 제도의 조작이나 엄형ㆍ엄벌에 의한 권위나 협박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본질로부터 자연스럽게 비조작적으로 형성되어 나가는 질서라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에 두었다는 의미에서 이 『효경』은 유교의 성경(바이블, Bible) 일 수밖에 없다. (효경한글역주, 김용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