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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집주 학이(學而) 1-1] 공자의 일생은 배움으로 시작해서 군자로 끝난다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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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배우고(學而) 때에 맞게(時) 익히면(), 또한(亦) 기쁘지(說) 아니한가(不乎)?

 

* 공자(孔子) : 자(子)는 남자의 존칭으로 성 아래에 붙여 쓴다. 여기서는 공자를 가리킨다. 공자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공 선생님'이다.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다. 공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낳으려고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해서 이름을 '구'로 지었다고 한다. 또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서 언덕 구(丘)로 지었다고도 한다.

 

* 時習: '시時'를 왕숙은 '이시以時'라고 보고 '적당한 때, 때에 맞추어'라고 해석했고, 주자는 '시시時時'라고 보아 '항상, 수시로'라고 해석했다. '습習'을 주자는 '복습'으로 생각했고, 다산은 '실습'으로 생각했다. '학學'은 아는 것이고 '습習'은 실천하는 것이므로 결국, '지知'와 '행行'이 같이 향상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예를 배운 것은 '학學'이고, 제때에 문안드리는 것은 '습習'이다. (주주금석 논어, 김도련)

 

* 不亦A乎 : 또한 A 하지 않겠는가? 반어문으로 '대답이 필요 없는 상황이나 사실 확인이 필요한 상황에서 쓰인다. '不A乎', '非A與'도 같은 의미로 쓰이는 형식이다. 호(乎)는 '~인가?, 그러한가?' 따위의 의미다. 문장 끝에서 의문의 어기를 나타낸다. 고대 중국에서는 문장 형식을 표현할 때 지금처럼 문장부호를 쓰지 않았다. 이런 문장부호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글자로 나타냈는데, 지역마다 언어 습관이 달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글자가 여러 가지다(乎, 與, 哉, 耶, 邪). '역亦'을 어조사로 보고 해석하지 않기도 한다. 

 

○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학의(學之) 말 됨(爲言)은 본받음이다(效也). 사람의 본성(人性)이 모두(皆) 선(善)하지만(而), 깨달음에는(覺) 선후(先後)가 있어서(有),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늦게(後) 깨달은 사람(覺者)은 반드시(必) 먼저 깨달은 사람이(先覺之) 한 것(所爲)을 본받고(效), 이에(乃) 선을(善) 밝혀서(明而) 그(其) 처음으로(初) 돌아갈(復) 수(可以) 있다(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습(習)은, 새가(鳥) 자주(數) 나는 것이다(飛也). 배우기를(學之) 그치지(已) 않는 것이(不), 새가 자주 날갯짓 하는 것과 같다(如-也). 

 

說, 喜意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 而中心喜說, 其進自不能已矣.

열(說)은, 기쁘다(喜) 뜻이다(意也). 배우고(學) 나서(而) 또(又) 때때로(時時) 그것을(之) 익히면(習則), 배운 것이(所學-者) 익어서(熟而) 마음속이(中心) 기쁘게 되고(喜說), 그(其) 나아감(進)을 스스로(自) 그칠(已) 수(能) 없다(不-矣).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정자가 말하기를: 습(習)은, 반복해서(重) 익히는(習) 것이다. 때때로(時, 항상) 다시 생각하고(復思) 실마리를 풀어서(繹), 마음 속에(於中) 젖어들면(浹洽, 則) 기쁘다(說也).

 

又曰: “學者, 將以行之也. 時習之, 則所學者在我, 故說.”

또 말하기를: 배움이란(學者), 장차(將) 그것으로써(以) 실천하는 것이다(行也). 때때로(時) 그것을(之) 익히면(習-則) 배운  것이(所學者) 나에게(我) 있고(在), 그러므로(故) 기쁘다(說).

 

謝氏曰: “時習者, 無時而不習. 坐如尸, 坐時習也; 立如齊, 立時習也.”

사씨가 말하기를: 시습(時習)이란(者), <어느> 때고(時而) 익히지 않음(不習)이 없는 것이다(無). 앉기를(坐) 시동처럼(如尸) 하는 것은, 앉을 때(坐時)의 익힘이고(習也); 서기를(立) 재계하듯(如齊) 하는 것은, 설 때의(立時) 익힘이다(習也).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  

어떤(有) 벗이(朋) 먼 곳(遠方)으로부터(自) 오면(來), 또한(亦) 즐겁지() 아니한가(不乎)?

 

* 有朋: 유(有)의 기본 의미는 '가지고 있다'다. 하지만 고전에서는 '~이 있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有' 뒤에 오는 말을 주어로 해석한다. 반대말인 '무無'도 같은 형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 정이천은 '낙樂'은 '열'을 통해 얻는 것으로 '낙樂'이 아니라면 군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해서, '不亦說乎'와 '不亦樂乎'를 점층적 관계로 이해했다. 하지만 1장의 세 문장은 3개의 사건을 모아 하나의 장으로 만든 것일 뿐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교양인의 논어, 신동준)

 

樂, 音洛. ○ 朋, 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붕(朋)은, 같은 무리다(同類也). 먼 곳(遠方)에서(自) 온다면(來-則), 가까운 사람(近者)은 알(知) 수(可) 있다[말할 것도 없다].

 

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 又曰: “說在心, 樂主發散在外.”

정자가 말하기를: 선함으로써(以善) 남(人)에게 미치면(及-而), 믿고 따르는(信從) 사람(者)이 많고(衆), 그러므로(故) 즐거울(樂) 수 있다(可).” 또 말하기를: 기쁨은(說) 마음(心)에 있고(在), 즐거움(樂)은 발산(發散)을 주로 하니(主) 바깥(外)에 있다(在).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

남(人)이 <나를> 알아주지(知) 않더라도(不-而) 성내지(慍) 않으면(不), 또한(亦) 군자답지() 아니한가(不乎)?

 

* 人不知而不慍: '不A而不B' 형식이다. A 하지 않더라도 B 하지 않는다. (⇔ A而B)

 

* '不亦君子乎'에서 공문의 교육 목적이 군자 양성에 있고, 기본 교육이 진정한 군자(위정자)가 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오규 소라이는 공학의 정맥은 맹자가 아니라 순자에게 이어졌고, 공학의 핵심이 수신제가의 수신이 아니라 치국평천하의 위정에 있다고 했다. 학이 제1장은 순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권학의 내용과 상통한다. (교양인의 논어, 신동준)

 

○ 慍, 含怒意. 君子, 成德之名.

온(慍)은, 노여움(怒)을 품는다(含)는 뜻이다(意). 군자는, 덕을 이룬(成德) 사람의(之) 명칭이다(名).

 

尹氏曰: “學在己, 知不知在人, 何慍之有.”

윤씨가 말하기를: 배움은 나(己)에게 달렸고(在), 알아주고(知) 알아주지 않는(不知) 것은 남에게 달렸다(在人). 어찌(何) 노여움이(慍之) 있겠는가(有)?

 

程子曰: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정자가 말하기를: 비록(雖)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於及人) 즐기더라도(樂), 이것이(是) 나타나지(見) 않아도(不-而) 답답함(悶)이 없으면(悶), 바로(乃) 이른바(所謂) 군자라고 한다(君子).

 

愚謂及人而樂者順而易, 不知而不慍者逆而難, 故惟成德者能之. 

내가 생각하기에(愚謂), 남에게 (영향을) 미쳐서(及人而) 즐거운 것은(樂者) 순리라서(順而) 쉽지만(易), 알려지지 않아도(不知而) 노여워하지 않는(不慍) 것(者)은 거스르고(逆而) 어렵기 때문에(難-故), 오직(惟) 덕을 이룬 사람(成德者)만이 그것을(之) 할 수(能) 있다.

 

然德之所以成, 亦曰學之正, 習之熟, 說之深, 而不已焉耳.

그러나(然), 덕이(德之) 이루어지는 것은(所以成), 또한 배움이 바르고(學之正), 익힘이 익숙하고(習之熟), 기쁨이 깊어서(說之深而), 그치지 않는(不已) 것일 뿐이(焉耳)라는 말이다(曰).

 

○ 程子曰: “樂由說而後得, 非樂不足以語君子.”

정자가 말하기를: 즐거움(樂)은 기쁨(說)에서 말미암은(由) 뒤에야(而後) 얻어지니(得), 즐겁지 않으면(非樂) 그것으로써(以) 군자라고(君子) 말하기에(語) 부족하다(不足).


 

之를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구어에서 사용하는 리듬감의 표현으로 보고, 亦은 나의 내면적 욕구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고 동의를 구하는 강조의 의미로 해석한다.

​논어의 편명이 언제 어떻게 결정됐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첫 두 글자를 떼어낸 편명이 20편 모두에 같은 방식으로 결정된 것을 보면, 논어의 총 편집 체제를 확정할 때 한 번에 결정되었을 확률이 높다. 논어의 편명이 이렇게 자의적인 기호 체계를 가진 이유는, 아마도 그 내용이 단편의 모음이고, 그 단편 사이에 통일적 성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팔일편처럼 예악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의도적으로 편집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한 주제가 없어 보이는 각 편에서 우리는 내면적 필연성이나 통일성을 충분히 느낄 수도 있다.

학이는 모두 16장인데, 그중 8장은 자왈로 시작되는 간결한 공자의 말이고, 나머지 8장은 유자, 증자, 자하, 자공의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 장은 유약과 증삼을 자로 높이는 말들이 들어가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노나라 공문 학단에서 편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학이편은 공문에 들어오는 학도들에게 '선비가 되는 길'은 군자가 되는 길이며 정치권력으로 나가는 배움이 아니라는 공자의 철학을 선포하려고 편집된 장이라고 여겨진다.

논어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너무 새롭지 못하다. '배워서 열심히 익혀라'가 뭐 그다지 대단한 말인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공자와 그 제자들이 살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자는 지금 우리처럼 제도권 내에서의 배움을 강조한 사람이 아니다. 공자는 주나라가 몰락하고 기존의 귀족 교육이 유명무실해진 시대에 새로운 배움의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공자가 일생을 통해 추구한 배움의 내용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말하는 '육예六藝'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와 악이다. 고대 사회에서 예는 악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의 친구를 타지에서 찾아온 친구 정도로 해석하면 안 된다. 공자는 배움에 뜻을 두고 나서는 혼자만의 배움이 아니라 집단의 배움을 추구했다. 즉, 공자 학단은 최초로 배움을 위해 모인 자발적 집단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의 모습이다. 붕이란 개인적 친구가 아니라 배움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의 모임이다. 또한 원방은 노나라를 넘어서 먼 거리, 다른 나라에서 오는 친구일 수도 있지만 신분적 제한을 넘어서 야의 세상에서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공자의 유교무류 정신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1, 247-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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