顔氏家訓曰, 夫有人民而後有夫婦(부유인민이후유부부), 有夫婦而後有父子(유부부이후유부자), 有父子而後有兄弟(유부자이후유형제), 一家之親(일가지친), 此三者而已矣(차삼자이이의). 自玆以往(자자이왕), 至于九族(지우구족), 皆本於三親焉(개본어삼친언). 故, 於人倫(고어인륜), 爲重也(위중야), 不可無篤(불가무독).
안씨(顔氏) 가운에(家訓) 말하기를(曰), 무릇(夫) 인민(人民, 백성)이 있고(有) 나서야(而後) 부부가 있고(有夫婦), 부부가 있고(有夫婦 나서야(而後) 부자가 있고(有父子), 부자가 있고(有父子) 나서야(而後) 형제가 있고(有兄弟), 일가의(一家之) 친애함은(親), 이(此) 세 가지일(三者) 뿐이다(而已矣). 이로부터(自玆) 가서(以往), 구족에(于九族) 이르기까지(至), 모두(皆) 세 가지 친애함에(於三親) 뿌리를 둔다(本焉). 그러므로(故) 인륜에서(於人倫), 중한 것이(重) 되고(爲也), 돈독하지 않을(無篤) 수 없다(不可).
- 自玆以往: 自는 “~로부터”의 뜻이고, 玆는 이것(곳)이란 뜻이다. 以往은 以來와 같다.
- 皆本於三親焉: 焉(언)은 술어와 붙어서(술어+焉) 그 대상을(목적어를) 내포하기도 하고, 또는 단순히 처소격의 의미를 갖는 종결형 어조사로 쓰인다. 특히 문장 가운데에 처소격 어조사인 於가 있을 때는 이 焉으로 말을 끝맺기 마련이다.
莊子曰, 兄弟爲手足(형제위수족), 夫婦爲衣服(부부위의복), 衣服破時更得新(의복파시갱득신), 手足斷處難可續(수족단처난가소).
장자가 말하기를(莊子曰), 형제는(兄弟) 수족이 되고(爲手足), 부부는(夫婦) 의복이 되고(爲衣服), 의복이(衣服) 망가졌을 때는(破時) 다시(更) 새롭게 기울 수 있지만(得新), 수족이(手足) 잘린 곳은(斷處) 다시 잇기가(可續) 어렵다(難).
- 衣服破時更得新: '得新'을 직역하면 '새것을 얻다'가 된다. 하지만, 앞뒤 문맥과 상황을 고려하면 '낡은 옷을 깁다. 수선하다'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蘇東坡云, 富不親兮貧不疎(부불친혜빈불소), 此是人間大丈夫(차시인간대장부), 富則進兮貧則退(부즉진혜빈즉퇴), 此是人間眞小輩(차시인간진소배).
소동파가(蘇東坡) 이르기를(云), 부유한 사람과(富) 친한 척 하지 않고(不親兮) 가난한 사람과(貧) 소원하지 않으면(不疎), 이것이(此) 인간 중에(人間) 대장부고(是大丈夫), 부유하면(富則) 나아가고(進兮) 가난하면(貧則) 물러나는(退) 것은, 이것은(此) 인간 중에(人間) 진실로(眞) 소인의 무리다(是小輩).
- 此是人間大丈夫: “此是~”에서 此는 지시대명사로서 주어로 쓰였고, 是는 “~이다”의 뜻으로 술어이다. 윗글에서도 此라는 주어는 쓸 필요가 그다지 없다. 즉, 此가 없어도 주어는 문맥상 분명하므로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왜 썼는가? 7언의 댓구(4.3 4.3)을 맞추기 위해서 此라는 주어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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