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이 의식 활동에 따라 구체적인 사물로 대상화될 때, 사물은 항상 그 이면(無)에 의해 드러난다.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도 그 자체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이나 선하지 않은 것에 의해 상대적으로 성립한 것뿐이다.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斯惡已(사오이).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사불선이).
천하사람이(天下) 모두(皆) 아름다운 것이(美之) 아름답게(美) 됨을(爲) 알지만(知), 이것은(斯, 아름다움) 추한 것(惡) 일뿐이다(已). 모두(皆) 좋은 것이(善之) 좋게(善) 됨을(爲) 알지만(知), 이것은(斯) 좋지 않은 것(不善) 일뿐이다(已).
* 저본, 河上公本에는 ‘斯’가 있으나 竹簡本과 帛書本에는 없다. 이 부분은 통상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웨일리(Arthur Waley)는 이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현실주의자들 예컨대 法家는, “국가가 권장하는 덕목을 완벽하게 成文化하면 쉽사리 아름답게 된다고 생각한다.”는 해석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주로 法家)에 반대하는 것이 道家의 입장이며 이런 맥락에서 《老子》의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이다.”란 말의 의미가 훨씬 구체적일 수 있다. (동양고전 종합DB)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難易相成(난이상성), 長短相較(장단비교), 高下相傾(고하상경), 音聲相和(음성상화), 前後相隨(전후상수).
그러므로(故) 있음과(有) 없음이(無) 서로(相) 낳고(生), 어려움과(難) 쉬움(易)이 서로(相) 이루어주고(成), 길고(長) 짧음(短)이 서로(相) 비교되고(較), 높고(高) 낮음은(下) 서로(相) (기울어서) 차이가 생기고(傾), 소리와(音) 소리는(聲) 서로(相) 어울리고(和), 앞과(前) 뒤는(後) 서로(相) 따른다(隨).
* 高下相傾: 竹簡本에는 ‘涅’, 帛書本에는 ‘盈’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漢 惠帝 劉盈의 避諱로 보인다. 劉殿爵은 본래 ‘盈’이었다가 피휘로 ‘滿’으로 바꾸었다가 韻을 맞추기 위해 ‘傾’으로 다시 바꾼 것이라 보았다. (동양고전 종합DB)
* 音聲相和: '音聲'을 '말소리와 성대 울림', '목소리와 음악', '화합한 소리와 단일한 소리'처럼 다양하게 해석한다. (동양고전 종합DB) [설문해자]의 풀이에 따라 음(音)을 '가락, 곡조'로 성(聲)을 음률로 해석하기도 한다. [설문해자]에서는 '음이 성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이 마음에서 밖으로 나와 곡조가 있으면 그것을 '음'이라 하고, '궁상각치우'는 성이라 하고, 여러 악기의 소리가 음이다'라고 했다. (노자 도덕경과 왕필주, 김학목)
美者, 人心之所進樂也; 惡者, 人心之所惡疾也.
아름다움이란(美者), 사람(人) 마음이(心之) 나아가(進, 따르고) 즐거워하는(樂) 것이요(所也); 추함이란(惡者), 사람(人) 마음이(心之) 싫어하고(惡) 미워하는(疾) 것이다(所也).
* 人心之所樂進也: 《老子》에서 心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쓴고 용례가 많지 않다. 聖人은 常心이 없이 百姓의 心을 자신의 心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을 뒤섞는다.”거나 “그 마음을 비우라.”라고 말하듯이 통치의 수단이거나 행위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王弼의 注에서는 훨씬 많은 용례로 쓰이면서 지적이고 정서적인 전통적인 儒學의 개념으로 쓴다. (동양고전 종합DB)
美惡, 猶喜怒也; 善不善, 猶是非也. 喜怒同根, 是非同門, 故不可得偏舉也, 此六者皆陳自然不可偏舉之明數也.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은, 기쁨과 노여움(喜怒)과 같다(猶也); 선과 불선은(善不善), 옳고 그름(是非)과 같다(猶也). 기쁨과 노여움이(喜怒) 뿌리가(根) 같고(同), 옳고 그름이(是非) 문(門)이 같고(同), 그러므로(故) 한쪽만(偏) 거론할(舉) 수 없으며(不可得也), 이(此) 여섯(六) 가지(者)는 모두(皆)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을 늘어놓은(陳) 것이니 그것을(之) 한쪽만(偏) 들(舉) 수 없는(不可) 명백한(明) 방법(이치)이다(數也).
* 不可偏舉之明數: ‘明數’가 ‘有無’에서 ‘前後’까지 어느 하나만을 들어서 말할 수 없는 名에 해당하므로 의미상 ‘名數’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즉 어느 하나만을 들어서 밝히는 방법으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동양고전 종합DB). 明數를 '개념(이름 짓는 방법)'이라 풀이하고 '不可偏舉之明數'을 '한쪽만(偏) 들(舉) 수 없는(不可之) 개념(明數)'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왕필의 노자, 임채우)
* 여기서 왕필은 《장자》의 논리를 원용하고 있지만 《장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왕필은 《장자》와 달리 세계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데 멈추지 않고, ‘마음[心]’이라는 하나의 근원을 긍정한다. 왕필은 《노자》의 이 문장에서 美惡‧喜怒, 是非‧善不善을 동일하게 ‘自然’의 층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그에게 心은 오늘날 우리가 이성과 감성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情의 범주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양고전 종합DB)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이 때문에(是以) 성인(聖人)은 하려고 함이 없는(無爲之) 일(事)에 거처하고(處),
自然已足, 為則敗也.
자연스러우면(自然) 이미(已) 충분하고(足), 하려고 하면(爲則) 실패한다(敗也).
* 왕필은 自然을 주로 “자연스러움에 맡김[任自然]”(注5.1), “자연스러움을 본받음[法自然]”(注25.12), “자연스러움을 해침[傷自然]”(注12.1)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따르고 맡겨야 할 것으로 이를 어기면 해를 입고 상하게 된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동양고전 종합DB)
* 왕필의 자연은 '무위자연'의 자연과 다르다. 무위자연의 자연自然은 절대적인 도의 움직임이고, 왕필의 자연自然은 상대적인 도의 움직임이다. 1장에서 왕필이 '무無'를 절대적인 무와 상대적인 무로 나눈 것과 같은 논리가 자연에서도 작용한다. 즉, 절대적인 자연은 천지의 흐름 그 자체이고, 상대적인 자연은 분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존재 방식, 유가 무에 의해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도덕경, 김학목)
行不言之教(행불언지교);
말하지 않는(不言之) 가르침(教)을 행하고(行);
智慧自備, 為則偽也.
지혜가(智慧) 저절로(自) 갖춰졌으니(備), 억지로 하면(爲則) 거짓이다(偽也).
萬物作焉而不辭(不始)[不爲始](만물작언이불사위시), 生而不有(생이불유), 為而不恃(위이불시),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만물(萬物)이 거기에서(焉) 일어났지만(作而) 말하지(간섭하지) 않고(不辭)[시작하지 않고(不始) / 시작으로 삼지 않고[不爲始], 낳았지만(生而) 가지지 않고(不有), <무엇을> 했지만(為而) 뽐내지 않고(不恃), 공이 이루어져도(功成而) 거처하지(자처하지) 않는다(弗居).
- 萬物作焉而不辭: 저본, 河上公本에는 ‘作焉而不辭’라고 되어 있고, 竹簡本, 帛書本에는 ‘作而不始’로 되어 있으나, 王弼의 注17.1에 ‘萬物作焉而不爲始’라고 했다. (동양고전 종합DB)
因物而用, 功自彼成, 故不居也.
물을(物) 따라서(因而) 쓰고(用), 공덕(功)이 저것(彼)으로부터(自) 이루어졌고(成), 그러므로(故) 거처하지(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不居也).
夫唯弗居, 是以不去.
대체로(夫) 단지(唯) 거처하지(자처하지) 않으니(弗居), 이 때문에(是以) 사라지지 않는다(不去).
* 是以不去: 王弼은 아래의 注에서 말하듯이 不居를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洪奭周는 성인이 그 공을 자처하지 않으니[不居] 백성들이 떠나가지 않는다[不去]는 뜻으로 풀이했다. (동양고전 종합DB)
使功在己, 則功不可久也.
(만약) 공이(功) 자기에게(己) 있도록(在) 한다면(使, 則) 공이(功) 오래가지(久) 않는다(不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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