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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길/중용장구(中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20-i] 아홉 가지 원칙을 행하는 수단은 하나다 / 구경장(애공장)(九經章(哀公章)) /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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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원칙은 믿음과 진실함으로 행한다

20.14 凡爲天下國家有九經(범위천하국가유구경), 所以行之者一也(소이행지자일야).  

무릇(凡) 천하와 국가(天下國), 집안(家)을 다스리는(爲) 데는 구경(九經)이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行之) 수단은(所以者) 한 가지다(一也)

 

一者, 誠也. 一有不誠, 則是九者皆爲虛文矣. 此九經之實也.

일(一)은 성이다. 조금이라도(一) 성실하지 않음이 있다면, 이 아홉 가지가 모두 쓸모없는 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아홉 가지 원칙의 실체다. 

 

20.15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범사예즉립 불예즉폐)

모든 일이 미리 정해졌다면 이루어지고,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면 행해지지 않는다. 

 

言前定則不跲(언전정즉불겁), 事前定則不困(사전정즉불곤), 行前定則不疚(행전정즉불구), 道前定則不窮(도전정즉불궁).

말이 미리 정해졌다면 엇갈리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졌다면 곤란하지 않고, 행동이 미리 정해졌다면 흠이 없고, 도가 미리 정해졌다면 다함이 없다. 

 

凡事, 指達道ㆍ達德ㆍ九經之屬. 豫, 素定也. 跲, 躓也. 疚, 病也. 

범사(凡事)는, 달도와 달덕, 구경 따위를 가리킨다. 예는 본래부터 작정한 것이다. 겁(跲)은, 갈마듬이다. 구(疚), 병이다. 

 

此承上文, 言凡事皆欲先立乎誠, 如下文所推是也.

이것은 윗 문장을 이어서, 모든 일이 다 먼저 성을 세우려고 한다는 말로, 다음 글의 미루어 말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20.16 在下位不獲乎上(재하위불획호상), 民不可得而治矣(민불가득이치). 獲乎上有道(획호상유도), 不信乎朋友(불신호붕우), 不獲乎上矣(불획호상의)

아랫 자리에 있으면서(在下位) 윗사람에게(乎上) <믿음을> 얻지 못하면(不獲), 백성의(民) <마음을> 얻어서(得而) 다스릴(治) 수 없다(不可). 윗사람에게(乎上) <믿음을> 얻는(獲) 데는 도(방법)이 있으니(有道), 벗에게(朋友) 믿음을 얻지 못하면(不信), 윗사람에게도(乎上) <믿음을> 얻지 못한다(不獲)

  • 民不可得而治矣: '可得' 뒤에 동사가 나오면 조동사가 되지만, 지금처럼 서술어를 연결하는 접속사 '而'가 나오면 서술어로 해석해야 한다. 

 

信乎朋友有道(신호붕우유도), 不順乎親(불순호친), 不信乎朋友矣(불신호붕우의);   

벗에게(朋友) 믿음(信)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有道), 어버이의 <뜻에>(乎親) 따르지 않으면(不順), 벗에게(乎朋友) 믿음을 얻지 못한다(不信)

  • 不順乎親을 해석할 때 '어버이에게 순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면 이상하다. 앞 구절의 信乎朋友有道과 마찬가지로 '어버이에게 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 맞다. 

 

順乎親有道(순호친유도), 反諸身不誠(반저신불성), 不順乎親矣(불순호친의); 誠身有道(성신유도), 不明乎善(불명호선), 不誠乎身矣(불성호신의).

어버이를 따르는 것에(順乎親) 방법이 있으니(有道), 자기 몸에(身) 돌이켜보아(反) 진실하지 않으면(不誠), 어버이에(乎親) 따르지 못하고(不順); 자신에게 진실하게 하는 것에(誠身) 방법이 있으니(有道), 선에(乎善) 밝지 않으면(不明), 자신에게(乎身) 진실하게 하지 못한다(不誠)

 

此又以在下位者, 推言素定之意. 

이것은 또한 아랫 자리에 있는 사람(下位者)에 대하여, 미리 정해둔다는 뜻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反諸身不誠, 謂反求諸身而所存所發, 未能眞實而無妄也. 

반저신불성(反諸身不誠)은,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마음에> 보존하고(所存) 드러낸 것(所發)이, 아직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에 능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不明乎善, 謂不能察於人心ㆍ天命之本然, 而眞知至善之所在也.

불명호선(不明乎善)은, 인심과 천명의 본연한 모습을 살펴서 지선이 있는 것을 참으로 알지 못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백성의 통치를 직접 담당하는 관리의 몸가짐을 설명한다. 관리와 백성은 서로 일체감이 있을 때 바람직한 통치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람은 먼저 상관과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친구에게 신망이 두터운 사람인 것이다. 친구에게 신망이 두터운 사람은 친구와 자기를 구별하지 않고 친구를 자기처럼 아끼고 위하므로 신망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아끼는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가장 우선이다. 결국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확장되어 친구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중용 강설, 이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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