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의 복성서
한유에 이어서 도학의 틀을 만든 사상가로 한유와 동시대 사람인 이고를 꼽을 수 있다. 한유의 제자라고도 하는데, 둘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에 형이라고 언급한 점을 보면 호형호제하는 친구 사이였다. 이고의 문장은 평이하면서 명료하고, 유교 경전의 철학적 내면을 잘 드러낸 명문으로 정평이 있다. 대표적 저술이 복성서이다. 한유가 당시의 절박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혁명가적 인물이었다면, 이고는 철학적 사유에 관심을 집중했고, 유교 경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불교가 말하는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매우 주정주의적 사유를 가진 내향적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의 위성과 불교의 성불
이고에게 있어 유학의 위성이란 과제는 불교의 성불이란 과제와 다를 것 없었다. 성인을 단순히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면, 당대 지식인에게 매력적인 과제가 될 수 없었다. 최소한 우주론적이고,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무엇인가 필요했다. '성인'이란 수양을 통해 지고한 경지에 올라 전우주와 합일하는 인간이다. 주역의 '여천지합기덕'이나, 중용의 '찬천지지화육'이니 하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우주론적 언어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이고였다.
〈復性書上〉
1. 人之所以爲聖人者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情也.
사람이(人之) 성인이 뒬(爲聖人) 수 있는 까닭은(所以-者) 성이고(性也), 사람이(人之) 그 성을(其性) 미혹하게 만드는(惑) 까닭은(所以-者) 정이다(情也).
喜怒哀懼愛惡欲, 七者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은, 일곱 개가(七者) 모두(皆) 정이(情之) 만든 것이다(所爲也). 정이(情) 이미(旣) 혼탁하면(昏), 성도(性) 이에(斯) 숨어버리고(匿矣), 성의(性之) 과실은(過) 아니다(非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也. 水之渾也, 其流不淸; 火之煙也, 其光不明, 非水火淸明之過.
일곱 가지가(七者) 순환하고(循環而) 차례로(交) 오고(來), 그러므로(故) 성이(性) 채울(充) 수 없다(不能也). 물이(水之) 혼탁하면(渾也), 그 흐름이(其流) 맑지 않고(不淸); 불이(火之) 연기를 내면(煙也), 그 빛이(其光) 밝지 않지만(不明), 물과 불의(水火) 맑고 밝음의(淸明之) 잘못이 아니다(非過).
沙不渾, 流斯淸矣; 煙不鬱, 光斯明矣; 情不作, 性斯充矣.
모래가(沙) 혼탁하게 만들지 않으면(不渾), 흐름이(流) 곧(斯) 맑아지고(淸矣); 연기가(煙) 가득하지 않으면(不鬱), 빛이(光) 곧(斯) 밝아지고(明矣); 정이(情) 일어나지 않으면(不作), 성이(性) 곧(斯) 가득 찬다(充矣).
2. 性與情不相無也. 雖然, 無性則情無所生矣. 是情由性而生. 情不自情, 因性而情; 性不自性, 由情以明.
성과(性與) 정이(情) 서로(相) 없을(無) 수 없다(不也). 그러나(雖然), 성이 없으면(無性則) 정이(情) 생겨날 곳이(所生) 없다(無矣). 이것이(是) 정이(情) 성을 말미암아서(由性而) 생겨나는(生) 것이다. 정은(情) 스스로(自) 정이 되지 않고(不情), 성으로 말미암아(因性而) 정이 되고(情); 성은(性) 스스로(自) 성이 되지 않는다(不性), 정으로 말미암아(由情以) 밝아진다(明).
性者天之命也, 聖人得之而不惑者也. 情者性之動也, 百姓溺之而不能知其本者也.
성이란(性者) 하늘의(天之) 명이고(命也), 성인이(聖人) 그것을 얻어서(得之而) 미혹하지 않는(不惑) 것이다(者也). 정이란(情者) 성이(性之) 움직인 것이고(動也), 백성이(百姓) 거기에 빠져서(溺之而) 그 근본을(其本) 알(知) 수 없는(不能) 것이다(者也).
聖人者豈其無情耶? 聖人者, 寂然不動, 不往而到, 不言而神, 不耀而光.
성인이(聖人者) 어찌(豈) 그(其) 정이 없겠는가(無情耶)? 성인이란(聖人者), 고요하게(寂然) 움직이지 않고(不動), 가지 않아도(不往而) 이르고(到), 말하지 않아도(不言而) 신묘하고(神), 빛을 내지 않아도(不耀而) 빛난다(光).
制作參乎天地, 變化合乎陰陽, 雖有情也, 未嘗有情也. 然則百姓者, 豈其無性耶?
만드는 것이(制作) 천지에(乎天地) 참여하고(參), 변화하는 것이(變化) 음양에(乎陰陽) 합하고(合), 비록(雖) 정이 있더라도(有情也), 일찍이(嘗) 정이 있지(有情, 정에 지배당하지) 않았다(未也). 그렇다면(然則) 백성은(百姓者), 어찌(豈) 그에게(其) 성이 없는가(無性耶)?
百姓之性與聖人之性弗差也. 雖然, 情之所昏, 交相攻伐, 未始有窮. 故雖終身而不自覩其性焉.
백성의(百姓之) 성과(性與) 성인의(聖人之) 성이(性) 차이가 없다(弗差也). 그러나(雖然), 정의(情之) 혼탁한 것이(所昏), 번갈아(交) 서로(相) 공격하니(攻伐), 애초에(始) 다함이 있지(有窮) 않다(未). 그러므로(故) 비록(雖) 몸이 다하더라도(終身而) 스스로(自) 그 성을(其性) 볼 수 없다(不覩焉).
여기서 이고의 성과 정에 대한 논의가 한유보다 훨씬 더 송유의 철학적 틀로 기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한유는 성에 대해서 정을 대적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고는 성의 방해자로서 정을 말하고, 성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정의 작동이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성을 무위의 '리理'로 보고, 정을 유위의 '기氣'로 보는 이원론적 틀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정론은 정명원각의 본심이 무명번뇌에 덮여 있다는 불교의 일반 논리에 유교적 언어를 입힌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이고가 성에 대해서 정을 폄하하지만, 성과 정을 존재론적으로 이원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고는 인간 존재에 어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한계 상황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어두운 존재를 끊임없이 밝은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수양 공부가 복성이라고 본다. 정을 부정하면서도 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고가 말하는 성인유정이다.
이고의 복성에서 주목할 것은 주역의 '적연부동寂然不動'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복성의 성은 주정주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동적인 정의 세계를 불식시키고 정적인 성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성인정지이중정인의이주정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도 주정주의적 복성을 말한 것이다. 이런 발상에는 항상 '열반적정'이라는 불교적 색채가 보인다. (대학학기 한글 역주, 김용옥)
3. 火之潛於山石林木之中, 非不火也; 江、河、淮、濟之未流而潛於山, 非不泉也.
불이(火之) 산의 돌과(山石) 숲의 나무(林木之) 가운데에(於中) 숨어 있더라도(潛), 불이 아닌 것이(不火) 아니고(非也); 장강, 황하, 회수, 제수가(江、河、淮、濟之) 흐르지 않고(未流而) 산에(於山) 잠겨도(潛), 샘이 아닌 것이(不泉) 아니다(非也).
石不敲, 木不磨, 則不能燒其山林而燥萬物; 泉之源弗疏, 則不能爲江爲河, 爲淮爲濟.
돌이(石) 두드려지지 않고(不敲), 나무가(木) 갈리지 않으면(不磨, 則) 그 산림을(其山林) 태우고(燒而) 만물을(萬物) 마르게 할 수 없고(不能燥); 샘의(泉之) 근원이(源) 트이지 않으면(弗疏, 則) 장강이 되고(爲江) 황하가 되고(爲河), 회수가 되고(爲淮) 제수가 될(爲濟) 수 없다(不能).
東匯大壑, 浩浩蕩蕩, 爲弗測之深. 情之動靜弗息, 則不能復其性而燭天地, 爲不極之明.
동으로(東) 바다에(大壑) 물이 흘러가는(匯) 것이, 넓고 끝이 없어서(浩浩蕩蕩), 잴 수 없는(弗測之) 깊이가(深) 된다(爲). 정의(情之) 움직임과 고요함이(動靜) 그치지 않으면(弗息, 則) 그 성으로(其性) 돌아가서(復而) 천지를(天地) 밝힐(燭) 수 없고(不能), 끝이 없는(不極之) 밝음이(明) 된다(爲).
故聖人者, 人之先覺者也. 覺則明, 否則惑, 惑則昏. 明與昏謂之不同, 明與昏性本無有, 則同與不同二皆離矣. 夫明者所以對昏, 昏旣滅, 則明亦不立矣.
故聖人者, 人之先覺者也. 覺則明, 否則惑, 惑則昏. 明與昏謂之不同, 明與昏性本無有, 則同與不同二皆離矣. 夫明者所以對昏, 昏旣滅, 則明亦不立矣.
是故誠者, 聖人性之也. 寂然不動, 廣大清明, 照乎天地, 感而遂通天下之故. 行止語默, 無不處於極也. 復其性者賢人, 循之而不已者也, 不已則能歸其源矣. 《易》曰: 「夫聖人者,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勿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已矣.
그러므로(是故) 성이란(誠者), 성인의(聖人性之也. 寂然不動, 廣大清明, 照乎天地, 感而遂通天下之故. 行止語默, 無不處於極也. 復其性者賢人, 循之而不已者也, 不已則能歸其源矣. 《易》曰: 「夫聖人者,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勿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已矣.
4. 子思曰: 「惟天下至誠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爲能化.」聖人知人之性皆善, 可以循之不息而至於聖也, 故制禮以節之, 作樂以和之. 安於和樂, 樂之本也; 動而中禮, 禮之本也. 故在車則聞鸞和之聲, 行步則聞佩玉之音, 無故不廢琴瑟, 視聽言行循禮法而動, 所以教人忘嗜欲而歸性命之道也. 道者, 至誠而不息者也; 至誠而不息則虛, 虛而不息則明, 明而不息則照天地而無遺, 非他也, 此盡性命之道也. 哀哉! 人皆可以及乎此, 莫之止而不爲也, 不亦惑耶?
5. 昔者聖人以之傳於顔子, 顔子得之, 拳拳不失, 不遠而復其心, 三月不違仁.
옛날에(昔者) 성인이(聖人) 그것으로(以之) 안자에게(於顔子) 전했고(傳), 안자가(顔子) 그것을 얻어(得之), 가슴에 품고(拳拳) 잃지 않아서(不失), 길지 않지만(不遠而) 그 마음을(其心) 회복하고(復), 삼개월 동안(三月) 인에 어긋나지 않았다(不違仁).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其所以未到於聖人者, 一息耳, 非力不能也, 短命而死故也. 其餘升堂者, 蓋皆傳也.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子曰): 회는(回也) 아마(其) 거의 <도에> 가깝지만(庶乎), 자주 비는구나(屢空). 그(其) 성인에(於聖人) 이르지 못한(未到) 것이(所以者), 한 번 쉼일 뿐이니(一息耳), 힘써서(力) 할 수 없음이(不能) 아니고(非也), 명이 짧아(短命而) 죽었기 때문이다(死故也). 그 나머지(其餘) 당에 오른(升堂) 사람은(者), 아마(蓋) 모두(皆) 전했다(傳也).
一氣之所養, 一雨之所膏, 而得之者各有淺深, 不必均也.
한 기운이(一氣之) 기르는 것과(所養), 한 번 비내림이(一雨之) 윤택하게 해서(所膏, 而) 그것을 얻은(得之) 사람이(者) 저마다(各) 얕고 깊음이(淺深) 있으니(有), 반드시(必) 균일하지 않다(不均也).
子路之死也, 石乞、孟黶以戈擊之, 斷纓. 子路曰: 「君子死, 冠不免.」結纓而死. 由非好勇而無懼也, 其心寂然不動故也.
자로가(子路之) 죽으려 할 때(死也), 석을과(石乞) 맹염이(孟黶) 창으로(以戈) 그를 찔렀는데(擊之), 갓끈이 끊어졌다(斷纓). 자로가 말하기를(子路曰): 군자가(君子) 죽을 때(死), 관을(冠) 벗지 않는다(不免)라고 했다. 갓끈을 매고(結纓而) 죽었다(死). 자로가(由) 용맹함을 좋아하고(好勇而) 두려움이 없는(無懼) 것이 아니라(非也), 그 마음이(其心) 적연부동하기(寂然不動) 때문이다(故也).
曾子之死也, 曰: 「吾何求焉? 吾得正而斃焉斯已矣.」此正性命之言也.
증자가(曾子之) 죽을 때(死也), 말하기를(曰): 내가 무엇을 구했는가(吾何求焉)? 내가(吾) 바름을 얻어서(得正而) 거기에서(焉斯) 죽을 뿐이다(斃已矣). 이것은(此) 섬영을(性命) 바르게 했다는(正之) 말이다(言也).
子思, 仲尼之孫, 得其祖之道, 述〈中庸〉四十七篇以傳於孟軻.
자사는(子思), 중니의(仲尼之) 손자로(孫), 그(其) 할아버지의(祖之) 도를(道) 얻어(得), 중용(中庸) 47편을(四十七篇) 지어서(述以) 맹가에게(於孟軻) 전했다(傳).
軻曰: 「我四十不動心.」軻之門人達者公孫丑、萬章之徒, 蓋傳之矣. 遭秦滅書, 〈中庸〉之不焚者, 一篇存焉.
맹가가 말하기를(軻曰): 내가(我) 나이 사십에(四十) 마음이(心) 움직이지 않았다(不動). 맹가의(軻之) 문인 중에(門人) 통달한 사람인(達者) 공손추와(公孫丑) 만장의(萬章之) 무리가(徒), 아마(蓋) 그것을 전했다(傳之矣). 진나라가(秦) 책을 없애는 것을(滅書) 당해서(遭), 중용이(中庸之) 불타지 않은(不焚) 것은(者), 한 편이(一篇) 남았다(存焉).
於是此道廢缺, 其教授者, 惟節文章句威儀擊劍之術相師焉. 性命之源, 則吾弗能知其所傳矣.
於是此道廢缺, 其教授者, 惟節文章句威儀擊劍之術相師焉. 性命之源, 則吾弗能知其所傳矣.
6. 道之極於剝也必復, 吾豈復之時耶? 吾自六歲讀書, 但爲詞句之學, 志於道者四年矣. 與人言之, 未嘗有是我者也. 南觀濤江入於越, 而吳郡.陸傪存焉. 與之言之, 陸傪曰: 「子之言, 尼父之心也. 東方如有聖人焉, 不出乎此也; 南方如有聖人焉, 亦不出乎此也. 惟子行之不息而已矣.」於戲! 性命之書雖存, 學者莫能明, 是故皆入於莊、列、老、釋. 不知者謂夫子之徒不足以窮性命之道, 信之者皆是也. 有問於我, 我以吾之所知而傳焉. 遂書於書, 以開誠明之源, 而缺絕廢棄不揚之道幾可以傳於時, 命曰「復性書」, 以理其心, 以傳乎其人. 於戲! 夫子復生. 不廢吾言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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