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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후배/고문효경(古文孝經)

[고문효경 들어가기 5] 효경의 진위 논쟁과 당현종의 절충

by ഗൗതമബുദ്ധൻ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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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유향(劉向)이 비부(秘府)에서 전적을 정리하였는데금문과 고문을 대교(對校)하여 새롭게 18장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 유향텍스트에 정중(鄭衆)과 마융(馬融두 사람이 주()를 지었다고 하는데마융의 주 또한 고문텍스트에 대한 주였다고 볼 수 있다마융의 주는 후세에 전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고문 효경에 대한 한대의 주는 공안국(孔安國)의 전()이 유일한 것이다.

 

그 뒤로 ()나라에 들어서면서 정주(鄭注)와 공전(孔傳)은 다같이 학관(學官)에 세워지게 되었는데(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금ㆍ고문경이 다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 양말(梁末)의 전란을 거치면서 공전(孔傳)이 없어지고 말았다따라서 남북조시대의 진(, 557~589) 나라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6~581)의 시기에는 오직 정주(鄭注)만이 세상에 행하여졌다(수지隋志).

 

그러다가 수()나라 문제(文帝개황(開皇) 14(AD 594)에 비서감(秘書監왕소(王劭)가 경사(京師)에서 우연히 공전(孔傳)을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그것을 얻자마자 하간(河間)의 유현(劉炫자는 광백光伯당대의 석학)에게 보내었다유현은 새로 발견된 공전에 서()를 쓰고공전을 교정하여 소()라고 말할 수 있는 효경술의(孝經述議)』 5권을 짓고민간에서 공전(孔傳)을 강의하면서 유포시켰다. 당대의 유자들은 유현이 강술한 공전은 유현의 위작(僞作)이며 공안국 자신의 구본(舊本)이 아니다라고 공격하였다. 유현의 술의(述議)사건 이후로 공()ㆍ정(이주(二注)의 진위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이러한 논쟁이 심해지자, 당현종은 개원(開元) 7년(719), 제유(諸儒)에게 조(詔)를 내려 『공전』과 『정주』의 시비를 바로잡게 하였다.

 

이때에 『사통(史通)』의 저자인 대 역사가 유지기(劉知幾, 리우 즈지, Liu Zhi-ji, 661~721, 자는 자현子玄)는 고문을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12가지 증험을 세워 현존하는 『정주(鄭注)』가 역사적 정현의 주가 아님을 입증하고, 유현이 교(校)한 『공전』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사마정(司馬貞쓰마 전, Si-ma Zhen, 당 하내河內의 사람홍문관 학자자는 자정子正사마천에 대하여 자신을 소사마小司馬라고 불렀다)은 금문을 종주로 하고 공전도 유현의 위작이며 공안국의 구본(舊本)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양의(兩議)가 결론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당현종은 조()를 내려 잠시 양주(兩注)를 병행시킬 것을 명하였다(당회요唐會要』 77, 논경의論經義). (효경한글역주,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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