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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민간에 불타지 않고 옛 문서로 남아있던 것이 발견되며, 산의 동굴이나 집의 흙벽이나, 특별한 비부(府)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나라 이전의 육국문자(六國文字)로 쓰인 것이며 올챙이[蝌蚪] 같이 생긴 꼬부랑글씨, 즉 과두문자(蝌蚪文字) 등등의 고대자형으로 쓰인 문헌이라 하여 ‘고문경(古文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시경과 효경, 예기, 춘추 등은 노공왕(? ~ BC 129)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과두문자로 쓰인 공자 시대의 원문을 발견하면서 대표적인 고문경으로 남아 있다.
다만 고문경은 출현할 때마다, 이미 금문경으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박사(博士)들로부터 끊임없이 위서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으면서 금문경이 대세를 차지하고 동중서 등의 유가 정책도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으나, 전한 말 유흠이 고문을 정리하면서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고문경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금고문논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튼 금고문 논쟁 때문에 중국은 한대에 이미 치밀한 텍스트 비평 의식이 발전했고, 주석이라는 해석방법론을 확립했다. 이런 금고문 논쟁은 개별 경전에 따라서 세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더 이상 논급할 여지가 없다. 현재 전해지는 효경도 또한 이런 논쟁을 거쳐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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