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태우고 학자를 묻었다'라는 뜻으로 기원전 213년과 212년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합쳐서 말한다.
전말은 진시황 34년(BC 213) 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기사에 나온다. 함양에서 전국의 부로 70여 명을 초청한 대규모 연회가 열렸는데, 참가자 중 한 명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를 찬양했다. 이때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충신이 고인(古人)들의 지혜를 본받지 아니하고는 제국을 장구(長久)하게 지킬 방도가 없다고 하면서 옛것을 버리지 말 것을 주장했다.
당시 자리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리면 통치에 해롭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사는 이미 통일제국이 완성되었고(BC 221), 체제가 하나로 정비되었는데 지식분자들은 제각기 사학(私學: 사사로운 학문)만을 고집하고, 변화된 현재를 인정치 아니 하고 옛것만을 배우려 하며, 당세를 비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고(古)를 말하여 금(今)을 해하고, 허언(虛言)을 수식하여 실(實)을 어지럽히는 일체의 사상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리어[別黑白] 하나의 지존을 정립하였으니 [定一尊],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 붕당을 조성하고 황제의 위세를 떨어뜨리게 하는 일체의 다양한 논의를 싹쓸이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다. 진(秦)나라에서 만들어진 관학과 의약 · 점술·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이외의 시(詩)ㆍ서(書), 제자백가 전적과 진을 제외한 나라의 역사서를 모두 불태울 것을 주장해서, 이를 실행에 옮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두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다. [효경한글역주, 김용옥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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