互鄕難與言(호향안여언), 童子見(동자현), 門人惑(문인혹).
호향 <사람은>(互鄕) 더불어(與) 말하기(言) 어려웠는데(難), 동자가(童子) <공자를 찾아와> 뵈니(見), 문인이(門人) 의아해했다(惑).
○ 互鄕, 鄕名. 其人習於不善, 難與言善. 惑者, 疑夫子不當見之也.
호향(互鄕)은, 향의 이름이다(鄕名). 그(其) 사람들이(人) 불선에(於不善) 버릇이 되어(習), 더불어(與) 선을 말하기가(言善) 어려웠다(難). 혹자는(惑者), 선생님이(夫子) 그를(之) 만나는 것이(見) 부당하다고(不當) 의심했다(疑-也).
子曰: “與其進也(여기진야), 不與其退也(불여기퇴야), 唯何甚(유하심)! 人潔己以進(인결기이진), 與其潔也(여기결야), 不保其往也(불보기왕야).”
그가(其) <깨끗이 하고> 찾아옴을(進) 인정하고(與也), 그가(其) 물러나서 <잘못하는 것까지>(退) 인정하지 않으며(不與也), 어찌(唯何) 심하게 하겠는가(甚)! 사람이(人) 자기를 깨끗이 하고(潔己) 그것으로(以) 나아가면(進), 그(其) 깨끗함을(潔) 인정하고(與也), 그(其) 지나간 일을(往) 보장하지 않는다(不保-也).
- 唯何甚 : 唯는 구 앞에 써서 어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이 경우 해석하지 않는다. 청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어찌', '도대체' 정도로 가볍게 해석할 수도 있다.
疑此章有錯簡. “人潔” 至“往也”十四字, 當在“與其進也”之前. 潔, 脩治也. 與, 許也. 往, 前日也.
이 장에(此章) 착간이(錯簡) 있는 것이(有) 의심된다(疑). 인결(人潔)에서 왕야(往也)까지(至) 열네 글자는(十四字), 마땅히(當) 여기진야의(與其進也之) 앞에(前) 있어야 한다(在). 결(潔)은, 닦아(脩) 다스림이다(治也). 여(與)는, 인정함이다(許也). 왕(往)은, 지난날이다(前日也).
言人潔己而來, 但許其能自潔耳, 固不能保其前日所爲之善惡也; 但許其進而來見耳, 非許其旣退而爲不善也.
사람이(人) 자기를(己) 닦아 다스리고(潔而) 오면(來), 다만(但) 그(其) 스스로 깨끗이(自潔) 했음(能)을 인정할 뿐이고(許耳), 진실로(固) 그(其) 지난날의(前日) 선하고 악한 것(所爲之善惡)을 보장할(保) 수 없으며(不能-也); 다만(但) 그(其) 나아가고(進而) 와서 본 것을(來見) 인정할(許) 뿐이니(耳), 그(其) 이미(旣) 물러나고(退而) 불선을 행함을(爲不善) 인정함이(許) 아니라는(非也) 말이다(言).
蓋不追其旣往, 不逆其將來, 以是心至, 斯受之耳. 唯字上下, 疑又有闕文, 大抵亦不爲已甚之意.
대체로(蓋) 그(其) 이미(旣) 지나간 날을(往) 쫒지 않고(不追), 그(其) 장래의(將) 올 것(악행)을(來) 미리 짐작하지 않고(不逆), 이것으로(以) 그 마음이(是心) 온다면(至, 斯) 그를(之) 받아들일 뿐이다(受耳). 유(唯) 글자(字) 앞뒤에(上下), 또(又) 궐문이(闕文) 있는(有) 듯하니(疑), 대저(大抵) 또한(亦) 너무(已) 심하게(甚) 하지 않는다는(不爲之) 뜻이다(意).
- ‘不追其旣往’은 ‘不保其往’의 해석이고, ‘不逆其將來’는 ‘不與其退’의 해석이다. ‘不逆’은 미리 逆探하는 것으로 〈憲問〉 33장에 “남이 나를 속일까 逆探(미리 짐작) 하지 않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臆測하지 않으나 또한 먼저 깨닫는 자가 어진 것이다.〔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라는 용례가 보인다. (논어집주, 성백효)
○ 程子曰: “聖人待物之洪如此.”
정자가 말하기를: 성인이(聖人) 남을 대함의(待物之) <도량이> 넓음이(洪) 이와 같다(如此).
학단이든, 조직이든, 모임이든 , 가장 무서운 병폐는 폐쇄적으로 운영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공문의 제자들도 그런 경향이 있었나 보다. 공자는 그런 폐쇄 문화를 싫어했다. 사람이 선의로 만나려고 하면 그 선의만 인정해서 만나주면 될 뿐이다. 앞뒤를 잴 필요가 없다. <논어 한글역주, 김용옥>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