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公問: “弟子孰爲好學?” (애공문 제자숙위호학)
애공이(哀公) 묻기를(問): 제자(弟子) 중에 누가(孰) 배우기를(學) 좋아하나요(爲好)?
- 爲(위)는 '~이다'라는 뜻의 동사지만, 뒤에 오는 형용사와 결합하여 '~하다' 또는 '~한 셈이다'라는 뜻의 술어를 이룬다.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유안회자호가), 不遷怒(불천노), 不貳過(불이과). 不幸短命死矣(불행단명사의)!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顔回)라는 사람이(者) 있어(有) 배우기를 좋아했고(好學), 노여움을(怒) <남에게> 옮기지 않고(不遷), <같은> 잘못을(過) 다시 하지 않았는데(不貳). 불행히도(不幸) 명이 짧아(短命) 죽었습니다(死矣)!
- 애공과 공자의 문답은 선진 편에 나오는 계강자와 공자의 문답과 내용이 같다. 다른 점은 애공에게 한 대답이 '불천노 불이과'와 '미문호학자야'라는 부가적 설명이 더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호학'이라는 말의 남다른 뜻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호학은 공자가 살면서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그래서 제자 누구에게도 '호학'할 만하다는 평가를 쉽게 내리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호학이라고 하면 정해진 틀 안에서 내 개념적 지식을 넓히고, 추리/인식 능력을 정밀하게 가다듬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호학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은 '불천노'와 '불이과'였다.
불천노는 쉽게 생각하면 '갑'에게 일어난 분노를 '을'에게 옮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분노를 남에게 옳기는 '화풀이', '분풀이'는 옳지 않다. 분노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르는 옳지 않은 사태에서 발생하고, 그것을 깨닫는 것은 내 도덕적 본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옮기지 않는 것도 내 도덕적 본성이다.
불이과는 인간은 모두 실수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성인도 허물이 있다. 허물을 허물로 자각하는 것은 천리의 대공을 전제로 한다. 보통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허물을 허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김용옥, 논어 한글역주>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금야즉무 미문호학자야)
지금은(今也則) 없으니(亡), 배움을 좋아하는(好學) 사람(者)을 아직(未) 듣지(聞) 못했다(未也).
- 則(즉)은 ~로 말하자면, ~로 말할 것 같으면, ~는의 뜻으로, 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사실의 대비 관계를 표시하는 접속사다. 여기서는 지금의 사실을 과거의 사실과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王入則侍景帝同輦, 出則同車游獵.(왕은 들어가서는 경제를 모시고 함께 손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나가서는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을 했다.) <史記 梁孝王世家>]
○ 遷, 移也. 貳, 復也. 怒於甲者, 不移於乙; 過於前者, 不復於後.
천(遷)은, 옮김이다(移也). 이(貳)는, 다시 함이다(復也). 갑에게(於甲) 화난(怒) 것을(者), 을에게(於乙) 옮기지(移) 않고(不); 전자에게(於前) 잘못한(過) 것을(者), 후자에게(於後) 다시 하지(復) 않는다(不).
顔子克己之功至於如此, 可謂眞好學矣. 短命者, 顔子三十二而卒也.
안자의(顔子) 자기를 이기는 공부가(克己之功) 이와 같음에(於如此) 이르러서(至), 진실로(眞) 배우기를 좋아한다고(好學) 말할 수 있다(可謂-矣). 단명(短命)이란 것은(者), 안자가(顔子) 서른두 살에(三十二而) 죽은 것이다(卒也).
旣云今也則亡, 又言未聞好學者, 蓋深惜之, 又以見眞好學者之難得也.
이미(旣) 지금은(今也則) 없다고(亡) 말한 것은(云), 또(又)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을(好學者) 듣지 못했다고(未聞) 말한 것은(言), 대체로(蓋) 이것을(之) 깊이(深) 안타까워하고(惜), 또(又) 그것으로(以) 진실로(眞) 배움을 좋아하는(好學) 사람을(者之) 얻기가(得) 어렵다는(難也) 것을 나타냈다(見).
○ 程子曰: “顔子之怒, 在物不在己, 故不遷. 有不善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 不貳過也.”
정자가 말하기를: 안자의(顔子之) 노여움은(怒), 물에 있고(在物) 자기에게(己) 있지 않으며(不在), 그러므로(故) 옮기지 않는다(不遷). 불선이(不善) 있으면(有) 일찍이(嘗) 알지 않은 적이(不知) 없고(未), 그것을 알면(知之) 일찍이(嘗) 다시 한 일이(復行) 없어서(未), 두 번(貳) 실수하지 않았다(不-過也).
又曰: “喜怒在事, 則理之當喜怒者也, 不在血氣則不遷. 若舜之誅四凶也, 可怒在彼, 己何與焉.
또 말하기를: 기쁨과 노여움이(喜怒) <마음이 아닌 상대방이 행한> 일(事)에 있으면(在, 則) 도리가(理之) 마땅히(當) 기뻐하고 노여워할 것이고(喜怒者也), 혈기에(血氣) 있지 않으면(不在則) 옮기지 않는다(不遷). 순임금이(舜之) 사흉을(四凶) 죽인(誅也) 것처럼(若), 노여워할 만한 것이(可怒) 저들(彼)에게 있으니(在), 내가(己) 거기에(焉) 무엇을(何) 관여하겠는가(與).
如鑑之照物, 姸媸在彼, 隨物應之而已, 何遷之有?”
거울이(鑑之) 물건을(物) 비추는(照) 것처럼(如), 곱고 추함이(姸媸) 저들에게 있으니(在彼), 외물을 따라서(隨物) 그것에(之) 응할(應) 뿐이고(而已), 무엇을(何) 옮겨감이(遷之) 있겠는가(有)?
又曰: “如顔子地位, 豈有不善? 所謂不善, 只是微有差失. 纔差失便能知之, 纔知之便更不萌作.”
또 말하기를: 만약(如) 안자의(顔子) 지위(地位)라면, 어찌(豈) 불선이(不善) 있겠는가(有)? 이른바(所謂) 선하지 않음은(不善), 다만(只) 이(是) 작은(微) 잘못이(差失) 있으니(有). 조금이라도(纔) 잘못이(差失) 있으면 곧(便) 그것(之)을 알았고(能知), 조금이라도(纔) 그것을 알면(知之) 곧(便) 고쳐서(更) 싹이 트지(萌作) 않았다(不).
張子曰: “慊於己者, 不使萌於再.”
장자가 말하기를: 자기에게(於己) 마음에 차지 않는(慊) 것이(者), 다시(於再) 싹트지(萌) 않도록 했다(不使).
或曰: “詩書六藝, 七十子非不習而通也, 而夫子獨稱顔子爲好學. 顔子之所好, 果何學歟?”
누군가 말하기를: 시서육예는(詩書六藝), 칠십의 제자가(七十子) 익히고 통하지(習而通) 않은 것이(不) 아니지만(非也), 그러나(而) 선생님이(夫子) 오직(獨) 안자가(顔子) 배움을 좋아한다고(爲好學) 칭찬했다(稱). 안자가(顔子之) 좋아한 것이(所好), 과연(果) 어떤(何) 배움인가(學歟)?”
程子曰: “學以至乎聖人之道也.” “學之道奈何?” 曰: “天地儲精, 得五行之秀者爲人.
정자가 말하기를: 배움으로(學以) 성인에(乎聖人) 이르는(至之) 방법이다(道也). 배움의(學之) 방법은(道) 어떻게 하는가(奈何)? 말하기를(曰): 천지가(天地) 정기를(精) 쌓고(儲), 오행의 빼어남을(五行之秀) 얻은(得) 것이(者) 사람이다(爲人).
其本也眞而靜. 其未發也五性具焉, 曰仁, 義, 禮, 智, 信. 形旣生矣, 外物觸其形而動於中矣.
그(其) 본체가(本也) 참되고(眞而) 고요하다(靜). 그(其) 발하지 않은(未發) 것이(也) 오성이(五性) 거기에(焉) 갖춰져 있으니(具), 인의예지신이라(仁, 義, 禮, 智, 信) 말한다(曰). 형체가(形) 이미(旣) 생겨나고(生矣), 외물이(外物) 그 형체에(其形) 접촉하면(觸而) 마음에서(於中) 움직인다(動-矣).
其中動而七情出焉, 曰喜, 怒, 哀, 懼, 愛, 惡, 欲. 情旣熾而益蕩, 其性鑿矣.
그(其) 마음이(中) 움직이면(動而) 칠정이(七情) 거기서(焉) 나오니(出), 희노애구애오욕(喜, 怒, 哀, 懼, 愛, 惡, 欲)이라 말한다(曰). 정이(情) 이미(旣) 왕성해져서(熾而) 더욱(益) 방탕해지면(蕩), 그(其) 성이(性) 깎인다(鑿矣).
故學者約其情使合於中, 正其心, 養其性而已. 然必先明諸心, 知所往, 然後力行以求至焉.
그러므로(故) 배우는 사람은(學者) 그 정을(其情) 단속/절제하여(約) 마음에(於中) 합해지도록 하고(使合), 그 마음을(其心) 바르게 하여(正), 그 성을(其性) 기를(養) 뿐이다(而已). 그러나(然) 반드시(必) 먼저(先) 마음에서 그것을(諸心) 밝히고(明), 갈 곳을(所往) 안(知), 뒤에야(然後) 힘써 행해서(力行以) 그거(도)에(焉) 이르기를(至) 구한다(求).
若顔子之非禮勿視, 聽, 言, 動, 不遷怒貳過者, 則其好之篤而學之得其道也.
안자가(顔子之) 예가 아니면(非禮)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은(勿視, 聽, 言, 動) 것 같음은(若), 노여움을 옮기고(遷怒) 두 번 실수하지(貳過) 않는(不) 사람이라면(者, 則) 그(其) 좋아함이(好之) 독실하고(篤而) 배움이(學之) 그 방법을(其道) 얻은(得) 것이다(也).
然其未至於聖人者, 守之也, 非化之也. 假之以年, 則不日而化矣.
그러나(然) 그(其) 성인에(於聖人) 이르지 못한(未至) 것은(者), 그것을 지킨 것이고(守之也), 그것을 화한 것이 아니다(非化之也). 그에게(之) 몇 년을(以年) 주었더라면(假, 則) 며칠이 지나지 않고(不日而) 화했을 것이다(化矣).
今人乃謂聖本生知, 非學可至, 而所以爲學者, 不過記誦文辭之間, 其亦異乎顔子之學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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